한국일보

바람과 양, 그리고 기억의 바다… 페로제도의 세 마을 이야기 ③

2026-01-09 (금) 07: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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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노은 여행 칼럼니스트

바람과 양, 그리고 기억의 바다… 페로제도의 세 마을 이야기 ③
페로제도는 바람의 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바람은 사람과 동물, 집과 교회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그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마을들은 단순한 정착지가 아니다. 신앙과 기억, 그리고 사람들의 의지가 쌓인 특별한 공간이다. 나는 제그브, 삭순, 키르큐보외르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제그브(Gjogv)- 협곡의 마을, 바람 위의 우산
제그브는 이름 그대로 깊은 바위 골짜기에 깃든 마을이다. 바닷가에 서면 파도와 절벽이 맞부딪히며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언덕에 오르면 온통 초록빛 목장 위로 양들이 무심히 바람을 맞고 앉았다. 좁은 길 옆에서는 갈매기들이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날고, 풀밭에서는 거위들이 줄을 지어 걷는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풀지붕을 얹은 흰 교회가 서 있다. 안개가 내려앉은 풍경 속에서도 교회는 분명한 중심이었다. 교회 주변 묘지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어, 바람과 파도가 함께 기도를 이어가는 듯 보였다. 그때 회색 하늘 아래, 바닷가에 서 있던 여행자가 펼친 붉은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 언덕과 검은 바위, 회색 구름 사이의 붉은 점 하나가 풍경을 하나의 그림처럼 완성해 준다. 위에서 내려다본 제그브는 소박하지만, 그 안의 삶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제그브는 바람을 피해 사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더불어 사는 마을이었다.

삭순(Saksun)- 바람이 기도가 되는 마을
삭순은 바닷가 끝자락에 자리한 고요한 마을이다. 풀지붕을 얹은 흰 교회는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서 있고, 안에는 단순한 제단과 나무 의자만 놓여 있어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마을을 조금 더 내려가면 풀지붕의 작은 집이 나타난다. 집 뒤로는 폭포가 층층이 흘러내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흰 실타래가 지붕 위를 감싸는 듯했다. 검은 벽과 돌담으로 된 집은 바람과 물소리 속에서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며, 시간의 은신처처럼 서 있었다. 주변의 잔디밭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안개는 능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린다. 사람의 목소리는 없어도, 바람 소리는 기도처럼 가만히 스민다. 삭순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교회와 폭포, 풀지붕 집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는 마을이다.


바람과 양, 그리고 기억의 바다… 페로제도의 세 마을 이야기 ③


키르큐보외르(Kirkjubøur)- 기억이 머무는 자리
페로제도의 남쪽 끝, 키르큐보외르는 ‘정신적 수도’라 불린다.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성 마그누스 대성당의 폐허다. 미완으로 남은 성벽은 여전히 웅장했고, 바람은 성벽 사이를 오가며 옛 기도를 전한다. 곁에는 지금도 예배가 이어지는 성 올라프 교회가 있다. 햇살이 흰 벽을 스치며, 기도가 세월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을에는 천 년 가까이 사람이 살아온 목조 주택도 남아 있다. 잔디 지붕과 붉은 창문을 단 검은 집은 시간의 은신처처럼 서 있다. 이곳은 바다와 맞서며 지켜온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바람 속에서
제그브, 삭순, 키르큐보외르. 서로 다른 세 마을이었지만 모두 바람과 함께 살아온 곳이었다. 바람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긴다. 양과 말, 닭과 거위가 풀밭에서 살아가고, 교회와 폐허, 목조 집들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여행을 마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버티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신앙,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그리고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 페로의 바람은 오늘도 그 답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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