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칙칙폭폭 ‘미니’ 기차 타고 마테호른, 콜로세움 한 바퀴

2026-01-09 (금) 12:00:00
크게 작게

▶ 노원기차마을

마테호른을 비추던 햇살이 저물자 산 중턱을 오가던 열차마저 조금은 느려진 것 같다. 차창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자 산자락 마을의 주민들도 하나둘 실내등을 켠다. 저녁의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스위스 마을의 서정적인 야경이 온전히 반짝인다. 마을 기차역에 들어선 전차. 그런데 옆 선로 열차가 눈에 익다 싶더니 우리나라 KTX 고속열차다. 스위스를 87분의 1 크기로 축소시켜 서울에 가져온 곳, 작은 배선 하나까지 정교하게 재현된 ‘미니’ 열차가 운행하는 이곳은 서울 노원구 화랑대철도공원 노원기차마을이다. 경춘선 화랑대역은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으로 71년 소임을 다하고 2010년 폐쇄됐다. 2017년부터 역사를 중심으로 조성된 철도공원은 널리 사랑받는‘편한 여행지’로 자리매김했다. 한창 기차를 좋아할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이색 분위기를 찾는 연인, 철도 애호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이다.

■ 소임 다한 간이역과 열차가 만난 철도공원

폐역 직후에는 쓰레기 불법투기와 불법주차가 판쳐 지역사회의 골칫거리였던 시기도 있었다. 독특한 비대칭형 조형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개발도 막혔다. 이때 노원구는 ‘쓰임을 다한 공간에 쓰임을 다한 물건을 더 들여다 놓자’는 역발상으로 철도공원화 사업에 착수했다. 세계 곳곳에서 운행을 마친 열차를 공수해 화랑대역으로 가져왔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1950년대 철로를 누비던 열차 두 대를 제공받았다. 하나는 화랑대역 정면에 전시된 거대한 증기기관차 ‘미카5-56호’. 1952년부터 경부선에서 화물차를 견인하다가 1967년 디젤 기관차 등장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견고한 기계구조에서 느껴지는 위용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검은 차체, 외부로 노출된 배관, 투박한 석탄 투입구는 현재 주류가 된 전동열차의 세련미와는 다른 결의 미감을 뽐낸다.

다른 하나는 협궤 증기기관차 ‘혀기-1형’. 협궤는 ‘폭이 좁은 철도’로 표준궤의 궤간(1,435㎜)보다 좁은 궤간을 뜻한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근대의 협궤는 궤간이 762㎜에 불과해 표준궤의 절반 수준이다. 열차명 ‘혀기’도 협궤의 일본어 발음인 ‘교키(きょうき)’에서 비롯됐다. 혀기-1은 1952년부터 1973년까지 수인선(수원~인천)과 수려선(수원~여주)을 누볐다. 표준궤 열차에 비해 작고 느리지만, 한때 수도권 지역 단거리 철도운송의 중추였다. 현재는 증기기관차 1대와 목재 객차 2량이 전시돼 있다. 객차 내부의 옛날식 나무 좌석에 직접 앉아 시대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자취를 감춘 전차(트램)도 3대 전시돼 있다. 체코 프라하 출신의 붉은 전차는 내부가 어린이 도서관으로 꾸며졌다. 전차 곳곳에 남은 체코어 낙서와 천진한 어린이 도서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그림책을 골라 아이에게 도란도란 읽어주는 부모들의 사랑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 구역이라 사진 명소로도 이름났다.

히로시마 노면전차는 개관 이듬해 무상 기증을 받아 들여왔다. 본래 대금을 지불하고 구매할 목적으로 구청 관계자들이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했는데, 현지 당국이 화랑대철도공원 취지에 공감해 비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양측 조종석이 개방돼 있어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은 전차다. 직접 조종석에 앉아 전차를 모는 감각에 몰입할 수 있다. 중앙 ‘특실’을 제외하면 외벽 없이 양 측면이 개방된 ‘대한제국 최초 전차’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복원·전시한 것을 들여왔다.

역사는 화랑대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옛 대합실과 매표소가 보존돼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목재 구조에 언제 적혔는지 모를 글자가 보인다. 과거 화랑대역의 모습을 축소 재현한 모형, 1960년대 사용되던 에드몬슨식 승차권과 펀치 기계, 화랑대역의 마지막 역장 권재희씨가 기증한 의복 등이 전시돼 있다.

역사 인근은 밤이 되면 ‘빛의 정원’으로 변한다. 옛 철길을 따라 약 400m 구간에 조성된 노원불빛정원은 주기적으로 바뀌는 주제에 맞춰 조명을 밝힌다. 역사에는 미디어파사트가 투영되고 기차 카페 앞 ‘아바타트리’도 환상적으로 빛난다. 자칫 을씨년스러울 수 있는 폐역의 밤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장치다.

■ 동심 잡아두는 ‘작은 유럽’ 기차마을


공원 외부를 둘러봤다면 실내 전시장인 ‘노원기차마을’을 필히 들러야 한다. 2022년 11월 개관한 철도마을은 유럽을 배경으로 각종 열차 모형을 전시한 디오라마 박물관이다. 주요 전시구역 전시품은 원본을 87분의 1로 축소 제작했다. 철도 모형의 국제 표준 규격이다. 주인공인 기차는 전부 실제 구동돼 관람객이 일부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현재는 1관인 스위스관만 운영 중이지만 이달 31일 2관인 이탈리아관이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다.

스위스관 내부는 마테호른, 융프라우 등 알프스의 상징적인 봉우리들과 취리히, 루체른, 제네바 같은 대표 도시 풍경이 재현돼 있다. 명소 40여 곳이 재현돼 있고 410m 길이의 14개 선로를 따라 기차 모형 18대가 운행한다. 10분 간격으로 낮과 밤이 바뀌어 야경도 즐길 수 있다. 특히 야경 시간에 맞춰 2층 난간 전망대에 올라서기를 권한다. 산과 산을 잇는 철교, 정감 있는 마을의 불빛, 야간열차가 달리는 궤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작은 기차가 꼬불꼬불 놓인 산악 철로를 달리는 모습에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고, 부모도 잠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기차마을의 전동모형을 제작한 ‘한국브라스’의 제품 수리실이 있다. 이따금 이곳에서 모형을 수리할 때면 투명한 통창을 통해 장인의 손길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2층에는 실전에 투입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포 ‘구스타프 열차포’의 전동모형과 회전기차 차고지 등이 전시돼 있다. 구스타프 열차포 역시 탄환 장전부터 발포 동작까지 전부 구현돼 있어 인기가 높은 전시물이다.

기차마을은 개관 이듬해부터 연 10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며 철도공원의 대표 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스위스관의 성공에 힘입어 개관 3년 2개월 만에 이탈리아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스위스관 대비 1.5배에 달하는 면적에 조성됐다. 철로의 길이(160m)는 줄었지만 랜드마크 조형물이 대폭 보강됐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로마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 등 이탈리아의 역사적 명소들이 전부 모였다. 2023년 성베드로대성당에 추가된 김대건 신부 성상 등 최근 모습을 충실히 재현했다. 지중해 크루즈와 ‘물의 도시’ 베네치아 재현을 위해 전시대에 물을 채워 넣는 도전도 감행했다. 물은 누수 등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통상 에폭시 등 투명한 소재로 대체한다.

역사적 명소의 비중이 커진 만큼 실감나는 연출에 더 신경을 쓴 모습이다. 크루즈 선박의 승객, 콜로세움의 군중, 절벽마을의 관광객은 전부 시대에 맞는 의상을 갖춰입고 실제 할 법한 행동을 하고 있다. 정교한 건축으로 이름난 이탈리아의 현장감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건축물 외형의 조각 하나하나 정교하게 재현됐다. 손톱만 한 대리석 조각상에 표현된 근육과 얼굴의 섬세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미니어처 제작 업체가 현장 답사를 통해 촬영한 사진을 종합해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다고 한다. 콜로세움 일부 소실된 유적지는 역사적 자료를 종합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설계 기간을 제한 순수 제작 기간만 1년이 넘게 소요됐다.

철도공원 못지않게 인기 있는 미니어처 시설은 카페 ‘기차가 있는 풍경’이다. 카페 창을 따라 깔린 철로를 운행하는 기차가 음료를 자리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로 유명하다. 카운터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 보면 작은 열차 한 대가 기적을 울리며 다가온다. 열차는 각 ‘역’에 30초 정차하니 사진을 남기고 지체 없이 음료를 수령해야 한다. 음료 배달 열차 외에도 천장을 따라 달리는 ‘제2 선로’와 20분 간격으로 발사되는 우주왕복선이 공간에 재미를 더한다. 기차가 배달하는 음료는 1층에서만 수령할 수 있지만 전체 규모는 3층이다. 위층에서는 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귀가하려고 보니 곳곳에서 소풍을 마치기 싫어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이 보인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집에 가기 싫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어릴 적 장난감 가게 앞에서 드러누운 추억이 있다면 누구든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