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학계와 연예계 종사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편해했지만 이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 진실을 폭로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듯 시치미를 뗀다. 물론 말도 안된다.
필자는 과거 수년 동안 직원 채용과정에서 많은 기관들이 백인 이성애자들을 배제해버린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제이콥 새비지가 최근 콤팩트 매거진에 올린 에세이에서 설득력있게 주장했듯, 이같은 채용 관행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집단은 멜라닌 색소 부족으로 인한 불이익을 상쇄해줄 기술과 경험을 쌓을 시간이 부족했던 젊은 백인 남성들이었다.
새비지는 엘리트 기관의 초급 직원으로 입사한 백인 남성들의 수가 극적으로 하락했음을 시사하는 자료를 인용한다. 예컨대 신입 영화대본 작가의 경우 백인남성의 점유율은 48%에서 12%로, 정년보장 심사대상인 하버드대 인문학 부교수직에 오른 백인 남성 비율은 39%에서 18%로 떨어졌다. 이 모두가 지난 10년 사이에 이루어진 변화다.
혹자는 이같은 현상이 채용 대상인력 구성의 통계학적 변화를 반영한데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을지 모르지만 인구 구성은 그리 빨리 변하지 않는다. 1965년의 이민개혁 이후 전체 인구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84%에서 62%로 내려가기까지 꼬박 50년이 걸렸다. 너무도 명백한 이유로 인해 직장내 인적 구성변화는 젊은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2020년까지만 해도 전체 초기 경력직 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백인이었다.
2022년도 대학 졸업생의 약 25%는 젊은 백인 남성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엘리트 직종의 신규 채용자들 가운데 평균 25%가량이 백인 남성들로 채워지리라는 산술적 예상이 가능하다. 초급 TV 시나리오 작가들 중 젊은 백인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12%로 떨어진 이유는 인구 구성 변화 때문이거나 방송사들이 다른 그룹에 대한 고용차별을 중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직을 “미국사회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젊은 백인 남성들을 역차별했기 때문이다.
‘다양성, 공정성과 포용성(DEI)’에 대한 반발을 이해하고 싶다면 특정 계층에 속한 밀레니얼 세대 남성들에게 “DEI 셈법”이 얼마나 불리한 것이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또한 DEI 목표 달성을 위한 셈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사람들은 소수계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줄기차게 과다하게 평가했고, 이 때문에 언론계와 헐리우드 스튜디오 및 학계의 백인 비중은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불공정한 채용 관행은 존재했다. 자격요건과 관계없이 흑인과 여성이 채용될 확률은 백인 남성에 비해 훨씬 낮았고, 이같은 차별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설사 소수계에 대한 고용차별이 없었다 해도 1960년대와 1970년대 및 1980년대에 태어난 대다수의 미국인이 백인이었기 때문에 언론사, 스튜디오내 작가실과 대학 강의실은 여전히 백인이 다수를 이루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코호트 효과를 간과한 이유는 DEI 논의의 상당부분이 대학 입학 문제에 집중되었기 때문인 듯 보인다. 대학 입학의 경우 비교적 빠르게 다양성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4년 연속 인종적으로 균형잡힌 학생들을 선발하면 금방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인적 구성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대기업 경영자는 보통 4년이 아니라 40년에 걸쳐 노동인력을 구성한다. 따라서 대표성을 고려한 채용을 통해 불균형을 시정하는데에는 수 십년이 걸린다. 하지만 DEI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시정조치는 과잉조치로 이어졌다. 상위관리계층이 백인 남성 일색이라고? 그렇다면 백인과 남성을 모두 배제한 직원 선발로 균형을 맞추면 된다. 그러나 수 십년에 걸쳐 구성된 인력을 단 몇 년간의 표적 고용으로 상쇄하려다 보니 젊은 백인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말 그대로 대본작가나 언론인으로 취업한 백인 남성의 씨가 말랐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여러 직종과 기업에서 이들의 취업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너무도 오랫동안, 백인 남성은 다른 그룹에 대한 차별로 이익을 본 수혜자였다. 이를 뒤집는 것은 공정한 일이다. 물론 조금 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불공정한 것이긴 하지만, 노예제도와 성차별과 같은 유산을 손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이처럼 어려운 문제는 가끔 불공정한 해법을 필요로 한다. 1914년에서 1927년 사이에 태어난 남성을 무더기로 징집해 나치와 싸우게 한 것은 결코 공정한 일이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1988년생 백인 남성에게 1930년에 태어난 또 다른 백인 남성이 1985년에 내린 채용관련 결정과 관련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는 용기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는 듯 보인다. 대신 필자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무수히 목격했다.
“대각성의 시대” 동안 채용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아는 사람들조차 이 모두가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평범한 백인 남성들의 망상이거나 공정한 경쟁을 견디지 못하는 특권층 백인 남성들의 불만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그룹으로써 젊은 백인 남성들이 다른 여러 집단에 속한 나머지 사람들과 공정한 조건하에 경쟁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적은 상급이 주어지는 훨씬 어려운 게임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다수의 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희생이라며 좋은 말로 양해를 구하는 것과 애초에 불리하게 짜여진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만일 우리가 후자의 태도를 취한다면 젊은 백인 남성들이 심판에게 욕을 하거나 “당신들이 정한 규칙을 따를 수 없다”며 시합 자체를 거부한다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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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건 매카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