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장준식 목사/ 밀피타스 세화교회

2025-12-17 (수) 11: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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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낭만

연애 초기에는 왜 그토록 세상이 반짝일까. 길가의 이름 모를 꽃도, 카페의 흔한 음악도, 평범한 오후의 햇살도 다르게 다가온다. 답은 간단하다. 감각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이 온몸의 안테나를 세우고, 세상의 모든 신호를 수신하게 만든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익숙해진다. 무뎌진다. 감각이 닫힌다. 처음엔 심장이 뛰던 일들이 이제는 당연한 일상이 된다. 낭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감각이 죽은 것이다.생텍쥐페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썼다. 같은 사막을 걸어도 어떤 이는 모래만 보고, 어떤 이는 우물을 예감한다. 차이는 눈에 있지 않다. 감각에 있다.

교회의 달력은 새해를 대림절로 시작한다. 세상의 달력이 1월 1일에 폭죽을 터뜨릴 때, 교회는 고요히 촛불 하나를 켠다. 대림(Advent)이라는 말은 '오심'을 뜻한다. 누군가 오고 있다. 그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 그리스도인의 시간을 다르게 만든다.우리는 두 개의 시간을 산다. 하나는 크로노스, 시계가 재는 일상의 시간이다. 출근하고, 밥 먹고, 잠드는 시간. 또 하나는 카이로스, 의미가 깃든 결정적 시간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부름을 받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크로노스는 흘러가지만, 카이로스는 찾아온다.그리스도인은 이 두 시간 사이에 선다. 일상을 살면서 종말을 기다린다. 버스를 타면서 구원을 소망한다. 이 '사이'가 기묘하다. 벌써 왔는데 아직 안 왔다. 이미 시작되었는데 완성되지 않았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already, not yet'이라 이름 붙였지만,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낭만’이라 부르고 싶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절망의 본질은 흥미롭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 자신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존재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영혼이 배고픈데 그 배고픔조차 모르는 상태,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이다. 현대인의 증상이 그렇다.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안 움직인다. 기도를 해도 말이 공허하다. 말씀을 들어도 스쳐 지나간다. 감각이 닫힌 것이다. 너무 많이 보아서 아무것도 못 보고,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것도 못 듣는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감각의 사막에 산다.그래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깨어 있으라." 헬라어로 '그레고레이테(γρηγορεῖτε)'. 이 단어는 단순한 잠 안 자기가 아니다. 감각을 살리라는 것이다. 영적 촉수를 세우라는 것이다. 졸린 영혼을 깨우라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 별을 보고 경이로워 했고, 폐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감각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고 노래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감각이다.그리스도인의 낭만도 같은 결이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우리는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오고 있기에 들꽃을 새롭게 본다. 기다림이 감각을 깨운다. 소망이 눈을 뜨게 한다. 그래서 같은 세상을 살아도 다르게 산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감각은 살아 있는가. 세상의 소음에 묻혀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바쁨에 쫓겨 영혼의 배고픔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익숙함에 취해 경이로움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낭만은 감각이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기다림 속에서 깨어난다.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 그 오심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것, 이 믿음이 우리가 지닌 감각의 안테나를 세운다.대림절에 다시 감각을 깨우자. 죽어가던 영혼의 촉수를 일으키자. 그때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일상에 카이로스가 스며들 것이다. 크로노스의 시간표 위로 은총의 시간이 겹쳐질 것이다.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낭만이다. 이미 왔는데 아직 오지 않은 분을 기다리며, 감각을 세워 오늘을 사는 것. 모래 속에서 우물을 예감하며 사막을 건너는 것. 아, 이렇게 낭만적일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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