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칠레에서 영국까지, 27년을 걷다

2025-12-17 (수)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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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경이로운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의 스토리만큼 놀라운 일은 드물 것이다. 지난 5일 워싱턴포스트지는 칠레 최남단 파타고니아에서부터 영국 중부의 항구도시 헐(Hull)까지, 27년 동안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시작은 농담 같은 내기였다. 20대 청년 칼 부시비(Karl Bushby)는 주점에서 친구들과 잡담하다가 남미 끝에서부터 영국의 고향까지 걸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때 그 말을 믿은 사람은 없었고,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치기어린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이 도전에 집착하게 되었고, 과연 가능할 지를 따져보다가 마침내 몇 년 후 실행에 나섰다.

모험의 배경에는 부시비가 영국군에서 낙하산부대원으로 11년간 복무한 경험이 있었다. 낙하산병은 남들보다 강한 체력과 지구력, 인내심이 필수이기 때문에 기본 맷집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군에서 동료 몇 명을 잃는 경험을 하면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짧은 인생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98년 11월1일, 부시비는 칠레의 푼타아레나스에서 대여정의 첫발을 떼었다. 수중에 가진 돈은 500달러, 종이지도와 연필, 계산기가 전부였다. 스마트폰이나 구글 맵 같은 것이 없던 시절, 지도를 펼치고 거리를 계산하며 하루 19마일씩 걸었다.

처음에는 누구의 서포트도 없었다. 길을 걷다 텐트에서 잠을 잤고, 누군가 먹을 것을 주거나 집을 열어주면 신세를 지며 하루하루 나아갔다. 그러다가 가족이 조금씩 보태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의 기부도 생겨났다.

영국의 고향까지는 총 3만1,000마일, 처음 계산으로는 12년 후 도착 예정이었다. 그러나 여정은 두 배 이상 길어졌는데, 이유는 돈이 떨어졌거나 비자 문제, 정치적 장벽, 날씨와 지형, 코비드 19 팬데믹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매번 어떻게든 문제를 돌파했고, 멈췄던 자리에 돌아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타고니아에서 출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중남미의 악명높은 다리안 갭 정글을 뚫고 멕시코와 미국과 캐나다를 지나 알래스카에 도착한 것이 2006년 3월, 남미와 북미를 관통하는 1만7,000마일을 7년반 만에 주파했을 때까지만 해도 여정은 계획대로 나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도착해서부터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고, 거의 10년 동안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우선 알래스카와 러시아를 잇는 베링해협을 건너는 일이 엄청난 도전이었다. 해협은 겨울에도 완전히 얼어붙지 않기 때문에 얼음과 바닷물을 뒤섞인 곳을 몸으로 헤치며 나아가야했다. 그는 한 프랑스인 모험가를 만나 함께 돕고 이끌며 14일 동안 58마일 구간을 150마일 우회하여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아무도 해낼 것이라고 믿지 못했던 위험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국경이 아닌 곳으로 들어왔다며 두달간 구금된 것을 시작으로, 두 차례나 러시아 입국이 거부되어 곤욕을 치렀다. 뿐만 아니라 비자 기간의 만료로 다시 알래스카로 돌아간 적도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느라 미국에 돌아와 LA에서 워싱턴DC의 러시아대사관까지 3,000마일을 걸었으며, 그러느라 후원이 모두 끊겨 어쩔 수 없이 쉬어야했던 일 등, 첩첩산중 갖가지 장애물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부시비는 포기하지 않고 걷기를 재개해 2017년 러시아와 몽골 국경을 넘었고, 2019년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났다. 때마침 지구촌을 강타한 코비드 팬데믹도 겪었으며, 2024년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아제르바이잔까지 카스피해를 31일 동안 헤엄쳐 건넜다. 이때는 현지의 수영선수 2명이 동행해서 179마일을 함께 수영했고, 밤에는 지원선에서 잠을 잤다. 이어 터키를 지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걸었고, 이제 고향까지 900여 마일을 남겨놓고 있다. 29세에 걷기 시작한 그는 현재 56세, 고향에는 2026년 9월 도착 예정이다.


부시비처럼 걸어서 세계일주한 사람들이 또 있는지 찾아보니 놀랍게도 여러 기록이 나온다. 미국인 탐험가 데이브 쿤스트(86)는 1970~74년 미네소타 주에서 시작, 여러 대륙을 통과하며 약 1만4,450마일을 걸어 세계일주를 완료했다. 또 스티븐 뉴먼(71)은 1983~87년 오하이오 주에서부터 약 2만1,000마일을 걸어 세계를 일주했고. 이 경험을 2권의 책으로 집필했다.

한편 개와 함께 걸어서 세계를 일주한 사례도 있다. 톰 투르시치(35)는 사바나라는 개와 함께 2015년부터 7년 동안 2만8,000마일을 걸어서 6개 대륙 38개국을 통과했다.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이기기 위해 걷기 시작했는데 세계 곳곳에서 많은 친절을 경험한 후, 지금은 사람들에게 인내와 모험에 대한 이야기로 영감을 주는 동기부여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부시비 역시 지난 27년의 경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동안 만난 사람의 99.99%가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라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좋은 곳”이라는 그는 집에 도착하면 앞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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