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크나텐, 3,500년 전의 종교개혁가

2026-03-04 (수)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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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인 필립 글래스(89, Philip Glass)는 20여 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초상오페라 3부작’이라 불리는 ‘해변의 아인슈타인’(Einstein on the Beach),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아크나텐’(Akhnaten)이다. 이 오페라들은 워낙 길고 난해하고 프로덕션이 장대해서 자주 공연되지 않는데, LA 오페라는 세 작품을 모두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그리고 지금 다시 10년 만에 ‘아크나텐’을 공연하고 있다.

세 오페라는 무력이 아닌 사상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천재과학자 아인슈타인, 비폭력주의자 간디, 그리고 종교개혁가였던 고대 파라오 아크나텐이 각각 주인공이다. 이들 중 아인슈타인과 간디는 모두 알지만, 아크나텐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3,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기록이 모두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크나텐은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에서 세계최초의 일신교를 창시했던 파라오다. 그의 아내는 미녀 왕비로 유명한 네페르티티이고, 아들이 ‘황금마스크’의 투탕카멘이다.


당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풍요로운 문화를 자랑했던 신왕국 제18왕조 시기, 아크나텐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수천년 전통이던 다신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텐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종교개혁을 선포했다. 그는 수도까지 옮기고 종교와 정치, 문화와 예술양식까지 개조한 급진적 혁명을 펼쳤으나 기득권층의 크나큰 반발을 사게 된다. 고대이집트는 신과 정치권력이 밀접히 얽힌 제의국가였고, 신전과 사제집단은 막대한 토지와 권력을 가진 거대한 경제세력이었으니, 아크나텐의 혁명은 단순한 종교개혁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재편하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결국 그의 사후에 투탕카멘을 비롯한 후계자들은 그의 개혁을 폐지하고 건물과 기념물을 파괴했으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석상이나 벽화들을 모조리 사포로 지우는 등, 아크나텐을 ‘기록말살형’에 처함으로써 아예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파라오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19세기 후반, 아크나텐이 건설했던 수도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1907년 파라오들의 비밀묘역인 ‘왕가의 계곡’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미라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이 미라는 2010년 DNA 분석 결과 아크나텐의 것으로 밝혀졌다.

필립 글래스의 초상3부작은 의식의 전환으로 기존 세계관을 전복하고 인식의 틀을 바꾼 인물들을 노래하고 있다. 간디의 비폭력(정치혁명),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학혁명)처럼, 아크나텐은 종교개혁을 통해 인간과 신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바꾸려했던 인류 최초의 혁명가였다.

오페라는 3막에 걸쳐 그의 통치 17년을 조명한다. 1막은 선친 아멘호테프 3세의 장례와 아크나텐의 대관식, 2막은 왕비 네페르티티와의 사랑, 다신교 신전의 파괴와 새로운 수도의 건설, 3막은 여섯 딸들과의 평화로운 생활에 닥쳐오는 위기, 공격당하고 붕괴하는 왕족의 비극이 그려진다.

스토리는 전통 오페라처럼 서사가 아니라 상징으로 표현되는데, 그 이미지들이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고 특별하다. 정교하고 화려한 의상, 매혹적인 무대세트와 조명, 10명의 저글러들이 공과 곤봉으로 펼치는 곡예의 시각적 효과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저글링은 4,000년 전의 이집트 무덤 벽화에도 그려있는 고대인들의 여흥이었는데, 연출가 펠림 맥더못이 그의 오페라 프로덕션에서 되살려내 볼 때마다 숨을 멎게 만든다. 맥더못의 전설적인 무대는 세 번째 보는데도 경이롭기 그지없다.


출연자들은 반복적이고 최면적인 미니멀리즘 음악의 흐름 속에서 3시간 내내 극도로 느린 슬로모션으로 움직인다. 카운터테너(보이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아크나텐 역은 존 할러데이가 호연했으나, 이 역에 특화되어 세계무대를 누볐던 앤소니 로스 코스탄조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10년전 바리톤 윤기훈이 노래했던 호렘합 장군 역을 이번엔 손형진이 맡았고, 당시 여섯 딸 중 하나로 출연했던 소프라노 박소영이 훨씬 중요한 어머니 티에 왕비 역을 썩 잘 소화했다.

노래가사는 고대 언어(고대이집트어, 아카드어, 히브리어 등)를 사용한 상징적인 소리들이어서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막은 제공되지 않는다. 서기관(재커리 제임스)의 리얼한 내레이션,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웅장한 낭송만이 생생한 전율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달리아 스타세브스카(41)가 지휘했는데, 박자감 조절이 쉽지 않은 필립 글래스의 오페라를 자신감 넘치게 조련해냈다. 이 오페라는 특이하게도 바이올린 파트가 없는데, 스타세브스카는 비올라와 첼로, 베이스가 섞인 무겁고 어두운 소리를 세련되게 이끌었다. 첫 공연이 있었던 지난 주말은 마침 푸틴의 침공 4주년, 트럼프가 이란을 공격한 첫날이었다.

한편 필립 글래스는 오는 6월 케네디 센터에서 예정돼있던 그의 심포니 15번 ‘링컨’의 세계초연을 지난달 취소했다. 공연장의 이름이 트럼프 케네디 센터로 바뀐 데 대한 비난이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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