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정훈 기자의 음악 산책>

2025-11-07 (금) 07: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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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배 음악과 바그너주의

<이정훈 기자의 음악 산책>
바그너 음악의 매력은 어쩌면 반 바그너파가 많다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반 베토벤, 반 모차르트, 반 베르디파는 없어도 반 바그너파는 많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이 금지되어있다는 사실만해도 음악가로서는 세계 유일하다. 그외에도 브람스 등 신고전주의가 바그너에 열렬한 반기를 들었으며 철학자 니체도 반 바그너파의 맹렬한 신도였다. 니체의 경우는 처음에는 바그너를 추종했지만 성배이야기를 그린 ‘파르지팔’을 보고 영원히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요즘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공연 중인 ‘파르지팔’을 보다가 왜 세상에 반 바그너파가 많은지, 또 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바그너와 나치를 동일시하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1막 (마지막)에 나오는 성배가 열리는 순간의 성배 음악이 흐르는 장면때문이었다.


성배가 어때서? 성배(Holy Grail)는 흔히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가 허리에 창이 찔릴 때 피를 받았다는 전설의 잔으로서 기독교의 신비주의를 상징하는 신물이기도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다빈치코드’, ‘아서왕의 전설’, ‘파르지팔’ 모두 성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성배의 무엇이 잘못이라는 것일까? 성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성배를 전면에 내세운 특정 종교의 우월주의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 달려 사망할 당시 피를 받았다는 성배는 예수의 거룩한 피(희생)가 인류의 죄를 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너무 거룩하여 기적을 베풀만큼 순결하고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의 이기주의를 찢고 대신 그 피로 새롭게 인류를 재 탄생시켰다는 기독교의 원론적인 이야기인데 그 자체로는 종교적인 신념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성배 등이 상징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대한 적대감과 우월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바그너는 사실 음악이 인간의 정신문화와 영혼에 강력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음악이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뿐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물질과 영혼의 대결(니벨룽겐의 반지), 사랑과 구원(방랑하는 화란인, 탄호이저), 희생과 기적(파르지팔) 등 대체로 종교적이거나 도덕(교훈)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문제는 자신의 예술과 거룩한 흰색(희생)에 대치되는 다른 색들에 대한 바그너의 입장과 생각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그너의 희생과 사랑(의 작품)에는 이에 대치되는 다른 색들에 대한 무자비한 모멸감이 있었다. 즉 자신들만 고귀한 희생을 떠받들고 그 유산을 이어갈 수 있는 민족, 즉 캘트족이자 게르만 민족의 후예라는 백색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이를 작품 속에 녹여냈고 반 유대주의자 히틀러 등 열렬한 추종자를 탄생시키면서 단순히 하나의 음악일 뿐이며 인간의 정서적 아름다움을 가꾸어야할 음악이라는 도구를 정치판에 끌어들이는 대 변혁을 일으키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바그너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바그너주의란 처음부터 너무 흰 색깔을 추구한 나머지 종교적으로 흘러버리고 말았고 그것은 또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구원받는다는 선민사상에서 그 색깔만 다를 뿐 또다른 선민 사상에 빠져버린 우를 범한 셈이 되고 말았다.(바그너 추종자들에게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러나 바그너의 사상적 색채가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의 음악이 꼭 경멸당해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바그너의 음악은 때론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고 정신적인 투지가 엿보이는 순수함과 강렬함이 있는지도 모른다. 바그너의 그런 정열이 없었다면 도저히 표현될 수 없었을 깊이와 심오함, 음악이 영적인 구원과 기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그너의 강인한 정신력과 긴 시간의 예술과의 싸움 그리고 구원이라고 하는 어떤 승화적인 감동을 예비하는 마음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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