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한철 푸르렀던 뒤뜰의 잔치가 서서히 막을 내린다. 떠나기 아쉬운 듯 고즈넉한 저녁 햇살이 빛바랜 잎새 위를 맴돈다. 철없는 늦깎이 열매는 아직도 연초록빛이다. 풋고추와 토마토, 그리고 무화과 열매의 민낯 기다림이 왠지 애처롭다. 우리 삶의 갈피 속에도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에 대한 미련이 저들처럼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별이라도 움켜쥘 듯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에 빛이 바래고 짊어진 무게에 짓눌린 미완의 꿈들이 지금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차마 전하지 못해 때를 놓친 고백,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발돋움하던 그날들을 돌아본다. 마치 아직 땡볕을 기다리는 10월의 연초록 열매처럼 설익은 아쉬움으로 노을 지는 들판에 서서 돌아본 외길(One Way), 그 미완의 길이 때로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늦었다는 체념으로 얼룩지기도 한다. 아마 열심히 달려왔지만 결승선에 다다르지 못한 마라토너의 허탈함이 이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완성’을 향해 달렸다. 삶이란 본디 미완의 스케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적지 않은 연륜 속에서 깨닫는다.
이 가을, 애처로운 작은 생명들에서 삶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덜 익은 토마토의 푸른빛에는 치열했던 여름의 기억이 서려 있고, 작은 무화과 열매 속에는 짧은 생을 향한 강인한 의지가 숨어 있으리라.
작은 고추는 그 존재만으로도 뒤뜰 한구석을 지키는 소중한 생명이었다. 완벽한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과정 속에서 흘린 땀과 눈물, 웃음과 열정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이룬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미완으로 남을지라도 끝까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저 여린 열매들은 결국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색으로 빛나려 애썼던 모든 순간이 바로 그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내 삶의 미완성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더는 붉게 익지 못할 아쉬움을 자책(自責)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본다.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애틋하고, 미완이기에 더욱 오래 기억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아닐까. 이제 미완성마저도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기꺼이 껴안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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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