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칼럼] 캘리에서 온 가을
        
            2025-11-04 (화) 12:00:00
            정유환 수필가        
     
    
    
    
    
    
    
                우체국 배달 밴이 앞뜰로 들어온다. 소포를 들고 온 직원이 사진을 찍고 돌아선다. 이틀 전 이메일로 알려 온 소포인가 보다. 소인을 보니 남편이 보낸 게 맞다. 상자를 열자 굵직한 붉은 대추가 넘쳐 떨어진다. 나무에서 충분히 익은 윤기 흐르는 탱탱한 씨알이 단단한 구슬처럼 바닥을 구른다. 한 알을 깨어 문다. 단 과즙이 입안에 확 퍼진다. 가을이다. 이 철에만 맛볼 수 있는 농익은 생대추의 향이다. 남편이 보낸 남가주의 가을이 단풍이 익어가는 일리노이 가을로 성큼 건너왔다.
떠나기 전 작고 푸르던 대추가 크고 탱글탱글한 붉은 열매가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참 잘했어요, 칭찬 스티커라도 붙여 달라는 듯이. 이걸 익히기 위해 온갖 원성을 들으며 힘을 아끼지 않았던 남가주의 뜨거운 태양이 새삼 고맙다. 열매를 지키려 애쓴 남편의 수고 역시 작다 할 수 없으리. 철을 따라 좋은 열매를 주신 하늘에 감사하며 달디~단 붉은 대추를 와삭 깨문다.
여긴 일리노이 샴페인 시 딸 집이다. 셋째를 낳은 딸을 도우려 잠시 머무르고 있다. LA를 떠난 건 7월 말이다. 뒤뜰의 감과 대추가 아쉬워 끌탕을 하는 내게 익으면 보내주마고 남편은 말했다. 아직 8월이 되기 전인데 아침에 나가 보면 다람쥐의 소행이 분명한 퍼런 대추가 뒹굴고 있었다. 작은 가지와 함께 바닥에 흩어진 잔해를 보며 어쩌면 열매가 익기도 전에 모두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거기다 새까지 극성스럽게 쪼아대니 다 익기까지 남아날 성싶지 않았다. 과일은 나무에서 충분히 익어야 제맛이 난다. 어찌 보면 자식 키우기와 비슷하다. 익기도 전에 수확하여 시장에 나온 푸른 대추는 단맛이 거의 없다. 왜 익지도 않은 걸 시장에 내놓았을까? 수확을 서두른 농부를 나무라다 나름대로 이유 있는 그들의 형편을 헤아려 본다.
			
			  
			
남가주에는 흔한 대추와 감이 이곳에선 귀하다. 한인이 많지 않아선지 감이나 대추나무가 없다. 딸네 집 뜰에는 복숭아, 체리, 사과나무가 있다. 여기에 대추와 감나무도 보태고 싶었다. 어느 여름 나무가 휘어지도록 체리가 열렸다. 이걸 다 어떻게 하지? 익기를 기다리며 행복한 궁리도 잠깐, 뜰에 나가보니 열매가 사라져 없는 게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 잔디밭에 까맣게 앉아 있는 새떼. 체리 도둑은 새들이었다. 가을의 사과도 그들 차지였다. 사위는 과일나무 심기를 포기했다. 자연의 모든 산물은 생자(生子)의 공동소유라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LA 집 뒤뜰에 사는 다람쥐와 새들의 소행은 귀엽다 할 만했다.
식구가 둘러앉은 저녁 식탁에 대추를 내어놓으며 속담을 들먹인다.
옛말에 대추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더라. 하나씩 먹어 봐. 기가 막히게 달다.
성큼 먹는 사위와 시큰둥한 딸. 대추의 가치를 모르는 게다. 별걸 다 소포로 보내느냐는 속마음이 엿보인다. 그래도 좋은 건 먹여야지. 칼을 들어 붉은 가죽을 쪼갠다. 푸르스름한 속살이 드러나 새색시 한복 같다. 한 조각 입에 넣더니 이제야 맛을 알았는지 딸의 눈이 동그래진다. 딸은 들며 날며 야금야금 다람쥐처럼 캘리에서 온 대추를 먹는다. 일리노이 다람쥐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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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