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삶의 부록

2025-09-15 (월) 12:00:00 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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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부록을 본문 뒤에 따라 붙는, 덤 같은 것으로 여긴다. 읽지 않아도 흐름에 지장이 없고, 건너뛰어도 괜찮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책의 심지는 바로 부록에 있다. 부록은 책의 끝자락이지만 본문보다 강렬하다.

나는 본문처럼 짜인 하루하루를 어머니로, 아내로, 교사로, 학생으로 살아왔다. 해야 할 일은 늘 분명했고, 선택보다는 책임이 먼저였다. 누군가의 필요에 알뜰하게 반응하던 손이 이제는 나의 여백에 먼저 반응 한다. 미처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살던 때는 부록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시간들은 소중했고 아름다웠지만, 이제 나는 조용히 찾아온 여백 앞에 섰다. 아이들은 성장하여 제 삶을 잘 살아내고, 사회적 역할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지금을 나는 '내 삶의 부록’이라 부르고 싶다. 염려하던 일들은 저만치로 갔다. 가끔은 자유롭게 잠을 자고 늦은 햇살을 만나는 여유를 즐긴다. 햇살을 바라보며 산책하며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들이 내 삶의 부록이 된다. 부록은 적은 것이지만 누군가 읽지 않아도 좋고 증명하거나 평가 받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장이다.

삶은 어떤 경고나 예고 없이 이 세상에 던져져 서문 없는 본문이 시작된다.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사는 동안 어느새 문장의 대부분을 채웠다. 그 안에는 개인의 이야기 보다 주어진 질서와 요구에 따라야 하는 이야기로 가득 하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스스로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부록은 데크레셴도가 아니라 크레셴도와 스타카토와 액센트로 시작한다.


키케로는 '노년에 대하여'의 본문에서 "노년은 활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시간" 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노년을 두려움이 아닌, 성숙한 전환의 시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늙었다고 해서 무조건 물러서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젊을 때 하던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 한다. 나이가 들면 몸의 기력이 약해지고 새로운 것에 적응이 느리고 때로는 외롭기 까지 하다. 노년은 예전처럼 달릴 수 없어도, 천천히 걸으며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겐가 필요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자신감이야말로 키케로가 말하는 활동적인 노년의 모습이 아닐까? 나는 이제 부록을 나만의 방식으로 채워가고 싶다.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르치고, 합창을 하며, 시를 쓰고, 내 색깔의 그림을 그리고, 글을 풀어낸다. 이 순간들이 내 삶의 부록을 구성하는 퍼즐이다. 나의 삶은 멈춤이 아닌 전환이며 조용하지만 단단해지는 기쁨의 순간으로 지속된다.

내 삶의 부록을 가장 나다움으로 한 줄 한 줄 채워간다면 이 부록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자유로운 본문 일지 모른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때의 자유가 아니라 싫은 것을 안해도 괜찮은 자유를 누린다. 내 삶의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시간이다. 부록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미루었던 것들을 다 포함한다. 문우들과 나누는 공감의 웃음, 길가에 꽃과 대화할 때, 아기들이 예뻐 자꾸 돌아다 볼 때, 들고양이와 눈을 마주칠 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 빛이 싱그러울 때 나의 부록은 아름다워진다.

<조형숙 시인·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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