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 기업들 ‘비자 편법’ 출장 관행이 화근 불렀다

2025-09-08 (월) 12:00:00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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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배터리공장 이민 단속 배경과 문제점
▶ 무비자(ESTA)로 입국시켜 건설 현장 투입 만연

▶ “한국정부 비자 논의 손놓고 있다 당해” 비판
▶ 제도 개선 시급… “한국인 특별비자 요구해야”

한국 기업들 ‘비자 편법’ 출장 관행이 화근 불렀다

지난 4일 연방 이민 당국의 최대 규모 급습 단속 작전이 벌어진 조지아주 엘라벨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모습. [연합]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대규모로 체포된 사건은 한미 간 비자 갈등이 본격화했음을 보여준다. 연방 이민세관단속국(ICE)이 헬리콥터와 군용 차량까지 동원해 공장을 급습한 이번 단속은 단일 사업장 기준 최대 규모의 이민 단속이었다. 체포 장면이 공개되며 한국 기업과 한인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 ESTA 남용이 핵심

사건의 핵심은 전자여행허가제(ESTA) 남용이다. ESTA는 관광이나 단기 출장 목적의 90일 체류만 허용하는 제도지만, 한국 기업들은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롭다는 이유로 이를 ‘단기 취업 비자’처럼 활용해 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재집권 이후 반이민 기조가 강화되면서 미 당국은 이를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ESTA 소지자 상당수가 공장 숙소에 장기 체류하며 실질적으로 근무한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 경직된 비자 제도의 벽

한국 기업들이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취업비자 제도의 경직성이 자리한다. 미국의 전문직 취업비자(H-1B)는 추첨 경쟁률이 10대 1에 달해 매년 2,000여 명 수준만 한국에 배정된다. 단기 상용 비자(B1)조차 심사에 수개월이 소요되며, 지난해 거절률이 27.8%에 이른다. 주재원 비자(L1·E2)는 원청기업과 직접 고용 관계가 있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협력사 직원에겐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결과 기업들은 수조 원의 투자를 진행하면서도 인력 파견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현실은 이미 수차례 경고 신호를 보냈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 엔지니어들이 미시간 공장 점검차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가 ESTA 장기 체류 이력 때문에 줄줄이 입국이 거부됐다. 현대차 기술 인력도 같은 이유로 애틀랜타 공항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결국 “ESTA 출장을 2주 이내로 제한하라”는 내부 지침을 내렸다.

■ 대안 없는 한국

문제는 대안 부재다. 미국은 싱가포르·호주 등 FTA 체결국에 전용 취업비자 쿼터를 배정했지만, 한국은 협상 과정에서 이를 확보하지 못했다. 싱가포르는 연간 5,400명, 호주는 1만5,400명의 전용 쿼터를 갖고 있는 반면 한국은 별도 배정이 전무하다. 이에 업계에서는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E-4) 신설”을 공식 의제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다. 외교부는 “비자 문제는 상대국 주권 사항”이라며 거리를 두고, 산업부는 “비자 업무는 외교부 소관”이라고 떠넘기고 있다. 결국 수조 원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들이 비자 문제를 각자도생으로 해결해야 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이번 단속으로 한국 인력 파견이 막힐 경우 공장 준공과 생산 일정이 지연되고, 이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도 직격탄이 될 수 있다.

■ 제도 개선 시급

트럼프 대통령은 “ICE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강경 입장을 보였다. 불법 체류자 100만 명 추방을 목표로 내건 만큼, 한국 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정치적 고려보다 우선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동맹국의 전략 산업 투자가 흔들린다면 장기적으로 미국에도 손해라는 점에서, 양국 모두 실리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민법 전문 박동규 변호사는 “결국 이번 사태는 기업이나 직원들의 책임이 아니라, 투자구조와 이민제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며 “미국 내 한국 기업 투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인력 이동을 합법적으로 뒷받침할 전용 비자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 정부와 기업 모두 ‘비자 외교’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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