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파원 시선] 미국 경제를 묻거든 라스베이거스를 보라

2025-09-06 (토) 05: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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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 관광산업의 위기는 미국의 경기 둔화를 예견하는 전조일까.

올해 여름휴가 때 서부를 방문하면서 라스베이거스를 1박 2일로 거쳐갔다.

한 가지 눈에 띄었던 점은 휴가철인데도 불구하고 주요 대형 호텔들의 숙박비가 예상보다 비싸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급 호텔 체인인데도 1박에 100달러(약 14만원)가 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물론 표시되는 방값에 세금과 리조트 수수료, 주차료가 추가되면 최종 방값은 수십 달러 더 불어나기 일쑤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가성비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라스베이거스의 명물 대관람차인 '하이 롤러'(High Roller)는 금요일 밤인데도 대기 줄이 전혀 없었고, 한 번에 40명을 태울 수 있다는 널찍한 관람차 캐빈에는 우리 가족 외에 다른 인도인 한 가족만 탑승해 다소 썰렁했다.

호기심이 발동해 방문자 수 통계를 찾아봤다. 훌륭하게도 라스베이거스 컨벤션·관광청(LVCVA)은 월간 단위로 방문자 수 속보치 통계를 내고 있었다.

통계로 나타난 라스베이거스 관광 산업은 한 마디로 위기 국면이었다.

올해 7월 기준 라스베이거스 방문자 수는 310만명으로 1년 전보다 12% 줄었고, 호텔 객실 점유율은 76.1%로 전년 대비 7.6%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라스베이거스 호텔의 가용객실당 수입(RevPAR)은 129달러로 전년 대비 13.8% 줄었다.

여름 성수기인데도 관광객 수가 대폭 줄어들다 보니 일부 호텔들은 어쩔 수 없이 손님들을 끌기 위해 특가 상품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브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인플루언서들은 올여름 방문객 부진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이미 오래전부터 라스베이거스 관광 산업의 몰락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최근 몇 년 새 라스베이거스의 가성비가 크게 나빠졌다는 점을 비판했다. 숙박비나 음식점 가격이 예전보다 많이 올라 굳이 라스베이거스를 찾을 유인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자면 라스베이거스의 관광업 부진은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의 매력도 하락이라는 지역적 특수 요인 탓이 된다.

하지만 올여름 라스베이거스의 관광객 급감은 이런 요인만으론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아 보인다.

라스베이거스 방문객 수는 2020년 팬데믹으로 급감한 이후 가성비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년까지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가성비가 문제였다면 올여름 평균 숙박비가 작년보다 떨어졌다는 점에서 올해 방문객 수는 작년보다 늘어나거나 최소한 급감하지는 않았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합병 위협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캐나다 관광객이 줄어든 게 부진 요인 중 하나로 꼽히지만, 두 자릿수대 관광객 감소를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아 보인다.

결국 올여름 라스베이거스 방문객 급감은 미국 소비자들의 경제 심리와 현재 경기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여가 관련 지출부터 줄이는 게 상식이다.

실제로 라스베이거스 방문객 수는 역사적으로 미국 경제 상황과 관련해 경기순행성을 보여왔다.

뉴욕증시가 여름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지갑이 두둑한 고소득층은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 있는 것과 달리 중산층 이하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는 분석은 여기저기서 나온다.

맥도널드는 최근 실적발표에서 저소득층 고객이 줄어드는 대신 중산층 소비자들 방문이 늘고 있다고 했다. 저소득층이 주로 찾던 달러트리, 달러제너럴 등 저가 상품 매장에 중산층 소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경기 관련 우려는 거시경제 지표에서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지난 5일 미국의 8월 고용 사정이 예상 밖으로 냉각됐다는 발표가 나온 이후 급격한 경기둔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7월 고용지표 발표 때 수치가 너무 나빠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통계가 조작됐다'라며 노동부의 통계 담당 국장을 전격 경질했는데, 8월 지표는 7월보다 더 나빴다.

최근 라스베이거스 방문객 수 부진은 이 같은 고용지표 상황과도 흐름을 같이한다고 보여진다.

월가 분석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은 미국의 성장세가 작년 대비 둔화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침체를 걱정할 상황은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오락가락한 정책 행보 특성상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분석가들은 미국 경기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미국이 기침만 해도 몸살을 앓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전 세계가 미국 경제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상황에서 미국 경기가 더 나빠지는지 아니면 되살아나는지를 보려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사정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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