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습 교통위반자 시민권 못 딴다

2025-08-18 (월) 12:00:00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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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정부 심사 강화
▶ 이민서비스국 새 지침

▶ ‘도덕성’ 검증 ‘칼바람’
▶ “합법적 영주권자 위협”

트럼프 행정부가 시민권 심사의 핵심 요건 가운데 하나인 ‘도덕성(good moral character)’ 평가를 대폭 강화하라는 지침을 내리면서, 시민권 신청 문턱이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이번 지침은 합법 이민자들에게까지 ‘도덕성’이라는 주관적 잣대를 강화하며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어, 한인 커뮤니티를 비롯한 이민자 사회의 불안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연방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서비스국(USCIS)은 지난 16일자로 발표한 지침에서 시민권 심사 담당관들에게 신청자의 도덕성 여부를 단순히 범법 기록 여부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개인의 사회적 행위와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기존에는 살인, 중범죄, 마약 범죄, 상습적 음주 등 이민법에 규정된 중대한 범죄 이력이 없을 경우 도덕성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새 지침은 “단순한 기계적 검토를 넘어 사회규범 준수 여부와 긍정적 기여를 입증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USCIS는 신청자의 도덕성을 평가할 때 ▲지역사회 활동 ▲가족 부양 및 유대 관계 ▲학력과 교육 성취도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고용 여부 ▲미국 거주 기간 ▲세금 납부 내역 등을 긍정적 요소로 고려하도록 했다. 반면 법 위반이 아니더라도 “평균적인 시민의 행태와 동떨어진 행동” 역시 결격 사유가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예를 들어 ▲무모하거나 상습적인 교통법규 위반 ▲괴롭힘이나 공격적 권유 행위 등은 법적으로는 합법이지만 시민의 책무에 어긋나는 행위로 분류될 수 있다.


또한 지침은 범법행위 전력이 있더라도 이후에 갱생과 회복의 노력을 입증할 경우 긍정적으로 참작하라고 명시했다. ▲집행유예 조건 준수 ▲체납 세금이나 양육비 납부 ▲지역사회로부터의 탄원서 제출 등이 대표적이다.

USCIS 대변인 매튜 트라제서는 C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는 미국 시민권 제도의 품격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 시민권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지위로, 오직 최고의 자질을 갖춘 이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시민권자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수용할 뿐 아니라 도덕성을 갖춘 모범적인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USCIS 고위 관계자로 일했던 더그 랜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지침은 합법 이민자들을 위축시켜 시민권 신청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의도”라며 “무해한 행동까지 도덕성 결격 사유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상습적 교통 위반까지 심사 대상에 포함시킨 점을 예로 들며 “사소한 생활 행위까지 문제 삼아 시민권 거부 사유를 늘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조치는 불법 이민 단속에 초점을 맞춰온 트럼프 행정부가 합법 이민 통로마저 사실상 좁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정부는 그간 남부 국경에 군병력을 투입하고, 불법 체류자 신속 추방을 확대하는 한편, 난민 수용을 사실상 중단하고 특정 국가 비자 발급을 제한해왔다.

이처럼 난민 입국 중단, 불법 체류자 단속 및 추방 등 반이민 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또 합법 이민 절차에서도 소셜미디어 활동 검증, 보안 심사 강화 등 새로운 장벽을 도입해왔다.

USCIS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매년 60만~100만 명의 합법 이민자가 시민권을 취득해 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지침 시행으로 시민권 신청 과정이 길어지고 탈락자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운 “이민제도의 정직성과 품격 회복”이라는 명분 뒤에는 사실상 합법 이민까지 억제해 미국 내 이민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 시민권 취득의 문턱이 높아질수록, 이민자 사회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지고, 이민자의 세대 간 정착도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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