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행잔고가 아니라 경험

2025-06-02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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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한 재정전문가가 하는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재정형편이란 게 항상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야할 돈이 많은 법. 아무 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그달 그달 내야 하는 납부금들이 줄을 잇는다. “돈을 벌줄 모르지 쓸 줄 모를까, 돈이 없어서 못 쓰지 있는 데도 못 쓸까~”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정이다.

그런데 재정전문가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소위 성공한 이민자들이 은퇴하면서 맞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관한 것이다. 한인사회에서 큰돈을 번 1세들은 대부분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비즈니스를 일궈냈다. 이민 와서 수십년 밤낮없이, 연중 휴가 없이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리고는 한 푼을 아끼며 악착같이 모았다.


그런 생활이 몸에 뱄는데 은퇴하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이 바뀐 것이다. 돈 벌기가 아니라 돈 쓰기를 하며 노후를 즐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돈을 쓰는 것도, 인생을 즐기는 것도 해본 사람이 하는 법이다.

모아 놓은 은퇴자금이 없어서 노후가 불안한 은퇴자들은 돈이 없어서 고민, 자금이 너무 쌓여있는 사람들은 돈을 쓸 줄 몰라서 고민이다. 죽을 때 싸가지고 갈 수도 없는 돈, 자녀들에게 왕창 물려주고 나면 돈벼락 충격에 자녀들 인생이 오히려 망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생을 충만하게 살려면 기본적으로 3가지 자원이 필요하다. 시간, 돈, 건강이다. 젊어서는 건강과 시간은 있는 데 돈이 부족하다. 반면 60대에 들어서 은퇴를 하고 노년을 맞으면 돈과 시간은 있는데 건강이 부실해진다. 돈 시간 건강이 균형 있게 갖춰진 시기는 30 넘어 60 즈음까지. 그 기간 열심히 벌고 저축해서 은퇴 후를 준비하자는 것이 일반적인 은퇴계획이다. 그런데 노후를 위해 너무 저축에만 매달리다보면 삶을 즐기는 걸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이다.

노년에 은행잔고는 빵빵한데 건강은 부실하고 살날은 많지 않다면 인생이 너무 허망하지 않겠는가. 평생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돈이 모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돈 버는 것 못지않게 지혜롭게 잘 쓰는 걸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베이비부머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런 생각의 전환에 영향을 준 것이 근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남김없이 쓰고 죽으라(Die With Zero)’이다.

저자 빌 퍼킨스는 말한다 : 은퇴의 삶에서 돈은 중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은퇴생활에서 우리가 얻으려는 건 좋은 추억들,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확실히 투자하라.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돈은 써야 가치가 있는 법, 돈이 아까워서 끌어안고 있다가 죽음을 맞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가 하는 주장이 “죽을 때 은행잔고가 0 달러가 되게 하라. 그걸 목표로 돈을 쓰라. 아니면 저축이 너무 과한 것이다”라는 것. 평생 하고 싶었지만 생업에 매여 못했던 것들, 여행이나 취미생활 자원봉사 자선사업 등 삶을 살찌우는 것들을 원 없이 해보라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일이나 기부도 살아생전에 해서 그 감동을 맛볼 것을 퍼킨스는 조언한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사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대략 4,000주(77살까지 살 경우 77x 52=4,004)로 본다. 그 주기를 단 한번 경험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즐겁고 멋진 경험들을 최대한 담아내는 것이 특히 노년에는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겠다. 잘 산 삶은 은행잔고가 아니라 경험이 결정한다. 돈 계산 그만하고 가진 돈을 최대한 잘 쓸 계획을 세우자.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재미있었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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