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유난히 꽃을 좋아하셨다. 20년 넘게 사셨던 노인 아파트 7층 널찍한 베란다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화분과 화초들로 가득했다. 철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은 엄마의 사랑을 나타내는 듯 반짝이며 언제나 싱그럽고 향기로웠다.
엄마의 일과는 꽃을 가꾸고 영어 공부 하러 다니는 것이 거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하도 학교에 열심히 다녀서 내가 ‘엄마, 나이 70에 영어공부 그렇게 열심히 해서 뭐 하려고?’했더니, 엄마는 정색을 하며 ‘영어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는 지 너는 모른다. Don’t you know?’ 배우고 익힌 것 한 가지를 슬쩍 써보신다. ABC도 모르던 분이 알파벳을 익히고 발음 내는 것을 터득하고 단어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면서 부터 도로 사인이나 간판은 엄마의 교재가 되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어디든 다니시며 글을 아는 게 이렇게 좋은 거라며 재미있어 하셨다.
하루는 엄마가 나를 베란다로 부르며 화분 하나를 가리켰다. 부겐베리아였다. 엄마는 내가 이름을 아는 것을 신기해했고 어디서 났느냐는 물음에 영어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줬다.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미국 여선생님이 꽃에 대한 공부를 가르치면서 자기 마당에 있는 나무 가지를 뿌리 내어 갖고 와서 주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몇 개를 갖고 왔는데?”. “하나!”. “그런데 그게 어떻게 엄마 차지가 됐어?”. “
“원하는 사람 손들라고 해서 내가 손을 들었지.” 나는 엄마가 얼마나 그것을 원했으며, 얼마나 재빨리, 높이 손을 들었을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신이 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초록색 잎사귀 몇 개에 빨간 꽃이 딱 한 개 피어있는 부겐베리아는 초록색 작은 플라스틱 화분 안에서 엄마의 사랑을 기대하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7층 베란다로 불어오는 초저녁 바람이 빨간 꽃잎을 살짝 흔들고 갔다.
“그런데 너 아니? 빨간 게 꽃인 줄 알지? 그게 꽃이 아니고 꽃받침이래. 꽃받침. 진짜 꽃은 요 안에 있는, 요 하얀 게 꽃이래. 너무 귀엽지 않니?”. “세상에!” 우리가 꽃이라고 하는 그 빨간 꽃받침 안에 아주 작은 팝콘 같은 하얀 꽃이 피어 있을 줄이야. 6.7개월 된 아기의 보드라운 잇몸을 뚫고 나오는 뽀얀 이빨처럼 앙증스러운 꽃술 같은 꽃 한 개가 목을 쏘옥 내밀고 있었다. 그 작은 꽃은 생끗 웃으며 살갑게 내게 다가왔다.
엄마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노트를 뒤적이며 원산지는 어디며, 꽃말은 무엇이고 꽃이 종이로 만든 것 같아 페이퍼 플라워라고 한다고도 했다. 부겐베리아 보다는 부겐베리가 좋다며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등 엄마의 부겐베리아 입양 설명은 끝날 줄을 몰랐다. 오래 전의 일이다.
엄마가 마지막까지 머무시던 양로원 마당엔 부겐베리아가 덩굴을 이루고 있었다. 휠체어에 엄마를 모시고 정원을 거닐며 나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다. 엄마가 얼마나 꽃을 사랑하고 잘 가꾸었는지 그리고 부겐베리아에 얽힌 이야기도. 엄마 마음 속엔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무심한 부겐베리아. 깊은 주름 위로 꽃그늘을 지었다.
“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래.”
부겐베리아 사이로 엄마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그리운 엄마! 오월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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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김 서예가ㆍ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