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교황 레오 14세와 ‘사랑의 순서’
2025-05-20 (화) 12:00:00
정영오 / 한국일보 논설위원
첫 미국인 출신 교황 레오 14세가 몇 달 전 자신 이름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공유한 JD 밴스 부통령 비판 기사가 화제가 됐다. 진보성향 미국 가톨릭 매체에 실린 이 기사는 가톨릭 신자인 밴스 부통령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순서’(ordo amoris) 논리를 들먹이며, 트럼프 정부의 불법 이민자 추방을 정당화한 것을 비판한다. 가족 사랑에 머물지 말고, 이웃과 사회 등으로 확장하라는 본뜻을 왜곡해, 마치 사랑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 보수 성향 미국 가톨릭 주류를 중요한 지지 세력으로 삼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 선출 직후 “미국에 큰 영광이며, 레오 14세와 만남을 고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신의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교황의 입장이 알려진 후 침묵하고 있다. 비판 대상인 밴스 부통령도 “교황을 정치화하려는 의도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트럼프 지지 세력인 ‘MAGA’의 설계자 스티브 배넌은 “그는 반트럼프 교황으로 MAGA 가톨릭교도에게 최악의 선택”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 레오 14세는 반트럼프 교황일까. 단정하기 어렵다. 우선 그의 소셜미디어에는 낙태권을 옹호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비판하는 글도 올라와 있다. 여성의 부제 서품을 반대하며, 학교 젠더 교육,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는 모두 트럼프 진영과 미국 내 주류 보수 가톨릭과 일치한다. 특히 미 공영 매체 NPR에 따르면 2012년 이후 공화당 예비선거에 투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민자·난민과 기후변화 관련 정책에서는 트럼프와 대립한다.
■ 보수와 진보 이슈가 뒤섞인 레오 14세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언론은 그를 중도라고 분류하는 듯하다. 이런 입장은 교황청이 처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 전 세계 신자가 교황청에 보내는 기부금인 베드로 성금(Peter’s pence) 중 미국 비중이 30%에 육박한다. 미국 주류 가톨릭 신자의 영향력이 짐작된다. 반면 신자와 성직자 증가율은 아프리카, 아시아가 유럽 미국보다 훨씬 높다. 레오 14세의 ‘사랑의 순서’ 고민은 가톨릭의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정영오 / 한국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