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좋아하는 작가 중 에릭 프롬이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가 쓴 책 <소유나 존재냐>는 근대이후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깊은 철학적 고찰을 담고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가 무엇인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점점 더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정신적 황폐함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겪는 나라 일 수록 국민들의 행복 지수는 떨어지고, 자살율은 높아지고 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풍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정신적 궁핍을 낳는 일이 현대인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다.
에릭 프롬은 그 원인을 근대화가 진행이 되면서 인류의 삶의 방식이 소유 중심적 삶의 양식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라 말한다. 20세기 들어 과학 기술의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 지면서 인류 삶의 양식은 점차 소비를 통해 물질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소유한다, 그리고 나는 소비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소유하는 것으로 일시적 풍요를 느끼지만 곧 결핍을 느끼게 되고, 더 큰 소비와 소유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참된 기쁨에는 이르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프롬은 소유를 통한 일시적 풍요가 아니라 존재를 통한 궁극적 풍요를 추구할 것을 제시한다.
에릭 프롬은 시를 통해 소유양식의 삶과 존재양식의 삶을 비교한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채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한 송이”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
이 시에서 저자는 꽃을 뿌리채 뽑아 소유하는 것으로 그 꽃을 이해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반면 “장미는 이유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필 뿐이다.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중세 앙겔루스 실레지우스)
이 시의 저자는 길가에 핀 꽃을 내가 소유하려 하지 않고, 소유 대신 길가에 핀 꽃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꽃을 소유하기보다 꽃의 존재를 즐거워하고 있다. 첫번째 시에서는 꽃을 꺾어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려 하는 소유 양식의 삶을 나타낸다면, 두번째 시는 꽃을 꺽어 내가 소유하는 것 보다 꽃이 핀 그 존재 자체를 바라보면서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존재 양식의 삶을 말하고 있다.
소유 양식의 삶이 추구하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소유를 통해 얻게 되는 즐거움은 참된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쾌락이다. 쾌락은 인간의 성장을 저해하는 욕망의 만족이다. 사회적 성공을 소유하는 것, 돈을 소유하는 것, 사람을 소유하며 지배하는 것으로 얻는 즐거움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쁨이 될 수 없다.
또한 쾌락은 궁극적인 기쁨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반면 존재 양식의 삶은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를 인정하면서, 존재와 교감을 하게 되고, 존재와 나누는 교감을 통하여 얻는 쾌락이 아닌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 즐거움이 진정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참된 기쁨이 되는 것이다. 에릭 프롬은 소유로 인한 쾌락이 아닌 존재로 인한 기쁨을 누릴 때,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는 소유를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게 끔 한다. 소유를 통한 쾌락의 한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신기루를 좇듯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 소유가 아닌 존재와 교감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참된 기쁨에 이르는 삶을 도전하는 에릭 프롬의 제안은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지침이라 생각한다.
<
유경재 나성북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