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떡잎’ 공들이는 대학·정부…제2의 딥시크 키우는 중
▶ ‘딥시크’ 베이징 거점 가보니
중국 수도 베이징 하이뎬구에 있는 과학기술원 단지 내 20층짜리 오피스 빌딩. 낮은 개발비로 미국 인공지능(AI) 모델을 따라잡은 AI 모델 '딥시크 R1'으로 전 세계 AI 산업 판도를 뒤집은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운영하는 '베이징 딥시크 AI 기초기술연구유한공사'(이하 베이징 딥시크)가 입주해 있는 곳이다.
항저우 본사와 함께 딥시크의 2개 법인 중 하나인 베이징 딥시크는 2023년 5월 본사와 같은 시기에 설립됐다. 딥시크의 언어 모델 알고리즘 연구가 이곳에서 이뤄진다. 구체적인 인력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개발자 수는 오히려 본사보다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베이징 지역 AI 인재들을 끌어모는 거점 역할도 하고 있다.
취재가 원천봉쇄된 것으로 알려진 항저우 본사와 달리 비교적 접근이 수월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6일 베이징 딥시크 입주 빌딩에 찾아가 "딥시크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자, "들어갈 수 없다"는 관리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전 중국 기자들도 찾아왔지만, 5층에 위치한 딥시크 사무실에 들어가진 못했다고 한다. 정식 취재 요청에도 딥시크 측은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 입주사 직원들에게만 발급되는 출입용 카드 없이는 비상구 통로조차 이용할 수 없었다.
최근 현지 매체 매일경제신문은 "이 빌딩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딥시크 애플리케이션(앱)을 쓰고 있지만 정작 딥시크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입주사인 한 정보기술(IT) 업체 소속 20대 여성 직원도 한국일보에 "얼마 전까지 딥시크란 회사에 대해 잘 몰랐다"며 "최근 갑자기 유명해지고 나서야 딥시크가 우리 빌딩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에게도 딥시크가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질 만큼, 그간 철저히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는 얘기다.
전 세계를 강타한 '딥시크 쇼크'를 지켜보는 중국 IT 업계의 흥분된 표정은 곳곳에서 읽혔다. 이 빌딩에는 포털사이트 바이두 같은 중국 기업뿐 아니라 애플, AMD 등 미국 기업 계열사들도 대거 입주해 있다. 애플 솔루션컨설팅에 다니는 중국인 원모씨는 "딥시크의 성공을 계기로 중국과 미국이 AI 분야에서 좋은 경쟁을 하면서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며 "나 역시 중국인으로서 딥시크의 성공을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 같은 건물 입주사도 몰랐을 정도
▶ 사옥 없지만 연봉 엔비디아 앞서
▶ 중 '천재 1명이 판도 바꿔’ 사활
▶ 토종 엘리트 육성⋯AI 산업 이끌어
한국일보가 베이징 딥시크를 방문한 이날 중국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바로 ‘딥시크 연봉’이었다.
딥시크 R1 모델 하나로 세계적 기업으로 거듭난 딥시크가 신입 개발자를 채용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빌딩 관계자는 “실은 어제도 지원자 한 명이 면접을 보기 위해 딥시크를 방문했다”고 귀띔했다.
딥시크 연봉은 스타트업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다. 중국 구인구직 플랫폼 보스즈핀에 최근 올라온 딥시크 채용 공고를 보면, 52개 직무 가운데 가장 낮게 제시된 연봉이 무려 50만 위안(약 1억 원)이다. AI 모델 개발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인재인 범용인공지능(AGI) 딥러닝 연구원의 연봉은 120만 위안(약 2억4,000만 원)에 달한다. 지난해 중국 대졸자 초봉(7만3,000위안)의 16배가 넘는 금액이다. 말단 급인 인턴 직원조차 ‘월급’ 1만 위안(약 200만 원)을 받는다고 한다.
▶ 세계 최고 AI 인재풀 배경은
중국 AI 업계에서 수억 원대 고액 연봉은 이미 예삿일이 된지 오래다. 중국 자율주행차량 AI 개발업체 모멘타의 딥러닝 분야 선임 연구원 연봉은 70만~112만 위안(약 1억4,000만~2억2,200만 원)에 이른다. 딥시크 등장 이전까지 AI 업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미국 엔비디아의 딥러닝 개발자 연봉도 78만~110만 위안(약 1억5,500~2억1,800만 원)에 걸쳐 있다. 미중 간 차이가 없는 셈이다.
중국 AI 업계는 우수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처럼 천재 한 명이 전체 시장 판도를 흔들고 게임의 규칙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분야가 바로 AI 산업이기 때문이다.
샤오미 창업자 레이쥔은 딥시크 AI 모델 개발에 핵심 역할을 한 ‘천재 AI 소녀’ 뤄푸리를 영입하기 위해 최소 1,000만 위안(약 20억 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뤄푸리는 일단 제안을 거절했으나, 샤오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 바이트댄스는 알리바바의 AI 모델 기술팀 12명을 통으로 빼 왔다. 하루아침에 핵심 개발자들을 잃은 알리바바는 반(反)경쟁협약 위반 혐의로 바이트댄스에 소송까지 냈다.
▶ 딥시크 52개 직무 채용 공고서
▶ 가장 낮은 연봉이 1억원 제시
▶ 딥러닝 개발자는 2.4억원 달해
중국 업체 간 ‘AI 천재 모시기’ 경쟁은 점점 가열되고 있지만, 미국 인재를 유치하려 한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중국이 미국을 견제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굳이 미국 인재를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 토종 인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해 세계 3대 AI 학회에 채택된 논문의 저자를 조사한 결과, 중국 기업·대학은 31곳으로 미국(37곳)을 바짝 따라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해 특허 출원 건수도 중국이 약 1만3,000건으로, 미국(8,600여건)을 거뜬히 제쳤다.
미국 폴슨연구소 싱크탱크인 매크로폴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 기업·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AI 연구자 38%가 중국 대학 출신이었다. 미국 대학 졸업자(37%)를 제치고 중국 인재들이 미국 AI 산업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재 풀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열매’가 될 ‘떡잎’을 미리 알아보고 공들여 키워낸 대학 시스템이 있다. 칭화대가 2005년 설립한 ‘야오반(姚班)’이 대표적이다. 중국 천재 공학자 야오치즈의 이름을 딴 야오반은 AI 인재 육성을 위한 별도 학급이다. 중국판 수능인 가오카오를 통해 1차 합격자를 선발한 뒤 다시 수학, 물리, 화학 실험을 통해 정예 엘리트들을 가려낸다. 수학·물리 올림피아드 수상자도 야오반 영입 대상이다. 야오반 설립 20년이 됐지만 이곳을 거쳐간 학생은 4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진입 문턱이 높다.
▶ 중 정부 AI 발전 계획 7년 만에 관련 기업 148만 곳 새로 설립
▶ 작년 특허 출원 미 거뜬히 제쳐
베이징대의 ‘투링(圖靈)반’도 비슷한 시스템으로 인재를 양성한다. 현지 매체들은 “야오반, 투링반에서 꼴찌를 해도 1년에 100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전한다.
정부 차원의 대대적 지원도 뒷받침됐다. 중국 국무원은 2017년 ‘차세대 AI 발전 계획’을 발표한 뒤 AI 업계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2020년 AI 기초 기술 분야 선두권 진입에 이어 △2025년 핵심 산업에 AI 적용 △2030년 AI 기술 세계 최고 수준 도달을 목표로 삼고 있다.
중국의 기업 데이터 플랫폼 치차차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중국 AI 관련 기업은 모두 167만 곳이다. 그중 약 90%인 148만 곳이 2017년 이후 설립됐다. 딥시크가 중국의 기술 인재 양성 시스템과 정부 차원의 중장기적 계획이 만들어낸 결과라면 조만간 제2의, 제3의 딥시크도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