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부터 파크골프 하는 분들과 크루즈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다른 일 제쳐놓고 여행그룹과 함께 6일 동안 바다위에 있었다. 바다만 보고 있으면 지루해지고 막막한 공간에 떠있는 듯한 공포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번엔 배안에서의 스케줄이 잘 짜여서 바다를 감상할 한가한 여유가 적었다.
한편 배 뒤쪽에서 보이는 엘에이 하늘은, 지난 7일부터 시작된 화마로 오렌지색 연무와 회색구름으로 덮여있었다. 몇 친구의 불안함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스케줄 따라 배를 탔기 때문에 화마는 잡혔는지, 친구 집은 안전한지, 위험한 집을 놔두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은 했는지, 궁금했으나 [카보 산 루카스]에 도착해서야 인터넷 연결로 안부를 알 수 있었다. 예기치 못했던 화마로 절망과 분노를 겪고 있을 지인들을 생각하니 크루즈여행이 좌불안석이 되었다.
첫 기항지는 <카보 산 루카스>였다. 그곳 광장에서 본 몇 구루의 고목들이 특이했다. 몸체가 커서 위용 있게 보이는 나무는 동서로 여러 갈래의 가지가 엉켜있다. 마치 깊은 땅속에서 칩거하며 생존해왔던 뿌리를 캐내어, 뒤집어 세워놓은 듯한 모습의 고목에는, 물론 잎이 하나도 없다. 세월의 주름마다 엉켜진 매듭을 남긴 나무 표피는 상처와 인내와 고독의 자화상 같았다. 누렇게 뒤틀린 피부를 살피고 있는데, 옆에 있던 지인이 소리친다. “위쪽을 보세요. 빨강 꽃이 피었어요. 그것도 3군데나, 꼭대기요!...” 꽃이 피었다니? 위쪽을 보았다. 붉은 꽃 3송이가 보인다. 고목에 꽃이 피다니! 신기해 보인다. 나무는 스스로 생존의 주기를 알기에, 때 맞춰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 같다. 신비로운 붉은 꽃!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할 때.” 이형기 시인의 [낙화]
고개를 들고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주위에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역시 고목 꼭대기에 피어있는 신기한 빨강 꽃은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오랜 세월 풍파에 이겨낸 결기가 아직도 남아서, 물이 줄기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인가, 그럼 등걸의 실핏줄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늙은 고목이 싱싱한 꽃을 피워낸 것이다. 척박한 현실의 환경을 초월한 자연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자연의 순리대로 핀 빨강 꽃은 어쩜 삶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엘에이의 기록에 남을 대형 산불로 피해를 입은 많은 분들이 2025년 새해에는 고목의 꽃 같은 희망과 안정을 갖기를 기원한다.
천천히 광장을 걸어 나오면서, 뒤돌아보면서, 붉은 꽃의 속삭임이 바람결에 스친다.
김인자 시인은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 ‘문학세계’에서 시, ‘창조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미주한국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미주한얼철학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미도서관 시인협회 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칼럼집 ‘노마드에 부는 바람’ 등이 있다.
<
김인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