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고정 시각

2025-02-06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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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뜨지 않았다. 짙은 회색 구름만 어두운 얼굴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눈이라도 오려나.. 눈이 올 수 없는 따뜻한 동네에 살면서도 간절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성급한 빗방울이 하나 뚝 떨어진다. 그 뒤를 이어 다시 하나 둘, 그리고 후드득 비가 온다.

한국에는 눈이 온다는데, 기록적인 한파에도 화난 사람들은 거리를 메웠다는데, 충동적인 가짜 뉴스들이 순전한 사람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한다. 내가 옳다는 것을 죽기 살기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양보하고 화합을 위해 마음을 모으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한 곳으로 고정된 시각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기회만 오면 다른 의견을 베어 버리려 한다. 성난 사람들의 아우성이 고국을 흔들고, 각 나라의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바싹 말라 있던 거리가 비에 젖고 있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발걸음이 종종거리며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가고,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는 노숙자들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그를 마주 보는 것이 불편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지만, 신호는 내 앞에서 바뀌고 차는 그의 옆에 멈추어 섰다. 비를 맞으며 차 안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를 마주한다.


미국에서 저소득층은 정부의 도움으로 기본적인 삶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병원비 걱정에 쉽게 가지 못하는 병원을 그들은 쉽게 들락거린다. 매달 나오는 푸드스탬프로 식생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노숙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그들 대부분이 마약이나 술 중독자다. 정부의 보조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도 하지 못해 마침내 거리로 나앉는다. 돌보지 못한 자녀들은 위탁가정에 맡겨져 힘든 삶을 살기도 한다. 우리 가게에도 그렇게 부모에게서 버려져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낸 직원이 몇 명 있다. 그들의 아픈 상처를 알고 나니 그 부모에 대한 노여움으로 중독자를 보는 내 시선도 곱지 않았다.

차 안에 앉아 비에 젖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어떤 삶을 살다 지금 저 자리에 있을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행의 파도가 그를 덮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마약이나 술 중독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 찬비 속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따뜻한 한 끼의 식사일지도…. 안락한 차 안에 앉아 그를 내 마음대로 정죄하고 있던 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고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들을 매일 아침 접한다. 평소 지지하던 정당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들의 주장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본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확신하게 했을까? 그들도 나를 보며 같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고정 시각이다. 마음을 열고 여러 방송국의 뉴스를 돌려가며 본다. 한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전달하는 것을 두루 접하며 내 저울의 추가 중심을 잡기를 기다린다. 숨을 고르고 마음의 긴장을 푼다. 귀를 열어 이견을 담을 공간을 넓힌다. 너무 날카로워진 고정 시각의 날을 두드려 무뎌지게 해본다.

허경옥 수필가는 ‘한국수필’ 신인상(2021)을 수상하면서 등단, ‘더 수필’에 2023년 빛나는 수필가 60인에 선정됐다. 2023년 미주문학에서 신인상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미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며 현재 폴로리다 거주하고 있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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