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초현실적인 LA와 서울

2025-01-14 (화) 12:00:00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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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히틀러가 물었다. 2차 대전 말 파리에서 퇴각하기 직전, 그는 파리 폭파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파리는 불타지 않았다. 당시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리 같은 문화 유산을 파괴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라는 분별력이 그에게 있었다. 지금 ‘LA는 불타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스’다. 산불에게는 독일군 장군 같은 분별력이 없다. 팰리세이즈 불부터 시작된 LA 곳곳의 화재가 일주일을 넘겼다. 산불이라기 보다 ‘LA 대화재’로 부르는 것이 맞다.

고급 주택가의 대형 화재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61년에는 LA의 대표적 부촌인 벨 에어가 화마에 휩싸였다. 버트 랭캐스터 같은 유명인의 집 등 500채 가까운 저택이 불에 탔다. 30여년 전 오렌지카운티 라구나 화재 때도 700여 채가 피해를 입었다. 이 불은 그 때 대화재(Great Fire)로 불렸다. 둘 다 샌타애나 바람 때문이었다. 이번 LA 대화재는 그 정도가 아니다. 지난 주말 현재 불탄 건물만 1만2,000채를 넘어섰다. 미국 각지에서 LA 불 소식을 전하며 ‘초현실적’이라는 말을 쓴다. 도대체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서울에서는 지금 또 다른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현직 대통령에게 내란 수괴 혐의로 체포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어느 나라나 대통령의 첫 번째 임무는 내란과 외환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니.


한국은 지난 20년새 다섯 대통령 중에 세 명이 재임 중에 탄핵 소추됐다. 다른 한 명은 퇴임 후 감옥에 갔다. 지금 한국은 준 내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체포를 두고 공권력과 공권력이 맞부딪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일이 아니다. 코리아 브랜드는 치명상을 입고 있다.

계엄처럼 엉터리 같은 일이 벌어졌음에도 처음에는 해외 여론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비 폭력적인 한국 특유의 시위 문화에다 민주주의 복원력에 거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분위기가 탄핵 후 한 달이 지나면서 싹 바뀌었다. 미 국무장관은 동맹국 대통령의 ‘비민주적 권력욕’을 공개 지적했다. ‘한국이 왜 적국인 북한의 전제주의, 러 중의 독재자와 비슷하게 됐나’라는 외신의 질문도 제기됐다.

은퇴 후 한국 살기 2년을 마치고 돌아온 한 LA 한인은 “한국의 좌우 갈등이 서북 청년단이 설치던 해방 이후 수준”이라는 인상기를 전한다. 극한의 이념 대립이 사회와 친구 간의 인간관계까지 멍들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지, 한국이 분단 국가인 걸 잊고 있었구나. 왜곡된 한국 정치 사회의 원인을 규명하는 키워드였던 ‘분단 시대’. 반 세기 전에 유행했던 사회과학 용어 같은 이 말은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탄핵 반대의 또 다른 에너지 원은 ‘희한한 후계 구도’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널리 퍼져 있다는 ‘윤석렬 끝나면 바로 이재명’이라는 승계 구도가 곧 그것이다. 이재명에게는 절대 비토 그룹이 있다.

그는 도시 빈민 출신이다. 아버지는 시장 청소부, 어머니는 공중 화장실에서 입장료 받는 일을 했다고 한다. 개인사를 보면 개똥 밭을 굴렀다. 지지 그룹에서는 기득권층의 적폐를 혁파할 기수로 기대하고 있는 반면, 반대 진영에는 그에 대한 포비아가 퍼져 있다고 한다. 치명적인 쌍욕 동영상 등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쌓인 부정적 이미지도 원인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탄핵 반대를 부르짖는 한국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계엄과 탄핵의 원인, 책임져야 할 사람은 이런 야당 대표가 아니다. 장본인은 그가 한 짓이 피 흘리며 지켜 온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임을 몰각하고 있는 대통령이다. 확신범이므로 그는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다 사라졌어!” 절규하게 하는 LA대화재의 초현실은 언제 끝날 것인가. 답은 샌타애나 바람이 쥐고 있다. 비현실적인 한국 상황은 어떻게 정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사회 구성원들이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다. (윤석열)헌재 심의, (이재명)법원 판결 등의 절차가 있는 것이다. 칼날 같은 국제 정세 속에 순식간에 나라를 망치고, 내란 상태에 몰아넣은 이가 누구인가. 단단히 책임을 따져 묻고, 바로잡는 노력부터 시작돼야 한다.

대화재의 현장인 LA와 탄핵 후 한 달이 지난 서울은 둘 다 초현실적인 상황을 겪고 있다. 두 도시의 정상화 해법은 다르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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