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문학 이념

2025-02-11 (화) 12:00:00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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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살면 한국인의 특성을 도드라지게 느낄 수 있다. 비교와 객관화가 더 쉽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는 노래 잘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노래방 출입을 할 즈음에는 대개 18번 한 곡쯤은 갖게 된다. 이 노래만큼은 ‘나가수’가 따로 없다. 미국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연말 파티 등의 ‘케리요키’ 시간에 음정, 박자를 제대로 맞춰 부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노래야 말로 연습이 대가를 만드는 분야여서 잘하는 건 그만큼 많이 불렀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비롯해 여러 고문헌은 우리 조상들에게 춤과 노래를 즐기는 습속이 있었다고 전한다. ‘노래 잘 하는 한국인’이 불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이런 모습은 북한에 가 보면 확연하다. 북에 갔을 때 금강산의 판매원도, 북측 비무장 지대로 내려가던 버스의 안내원도, 야외 수업을 하던 개성의 인민학교 교사도 “노래 한 곡 하겠습네다”하며 반주 없이 생음악을 들려줬다. 잘 하는 노래들은 아니었으나 없는 집에서 손님 대접하려는 정성이 느껴졌다. 평양의 광장에서 주민들이 군무를 추는 모습도 간혹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벚꽃 놀이 가서 덩실덩실 춤추며 노시곤 했었다.

케이 팝이 괜히 뜬 게 아니다. 원래 우리가 즐겨하고, 잘 하던 것이었다. 발라드, 트로트, 전통 가락도 물꼬만 트인다면 장르별로 세계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팔이 안으로 굽는 소리일 수 있겠으나 일하면서 틀어 놓은 라티노 이웃들의 뽕짝뽕짝 노래를 들으면 한국 가요의 격이 느껴진다. 한국 유행가를 프랑스어로 부르면 근사한 샹송이 된다. 머스타드로 유명한 디종에서 한국 노래를 즉석에서 프랑스어로 바꿔 부르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디종 시장의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신기한듯 ‘샹송화 된 한국 가요’에 귀를 기울였다. 이 친구의 노래 경력은 고교 때 합창반이 전부였다.

얼핏 떠오르는 한국인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문학에 대한 관심과 천착이다. 지나가는 미국인에게 현역 작가나 시인 중에 아는 사람을 묻는다면 몇 명이나 이름을 댈 수 있을까. 문학의 시대가 갔다고 하지만, 문학은 여전히 한국인에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인기 작가 몇 사람 정도를 아는 것은 상식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자서전 쓰는 보통 미국인, 은퇴 후 글짓기 교실을 찾는 미국인을 거의 들은 적이 없는 것과 비교된다.

한국은 시 잘 짓는 것 하나로 관리를 뽑던 나라다. 이런 숭문의 전통을 생각하면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늦은 감이 있다. “한국 문학은 보물 창고.” 한강의 소설을 번역했던 영국인의 말이다. 탁월한 직관과 감수성, 치열한 작가 정신에 ‘서늘하고도 뜨거운 시적 문체’를 가진 한국 작가가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의 작품이 다른 여러 언어로 잘 소개될 수 있다면 한류에 고급 문화의 목록이 더해질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집에 머물라(Stay Home)’는 것이 방역 지침이었다. “이럴 때 집이 없는 노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성장한 중졸 학력의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가 한 말이다. 작가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작가적인 시각, 보통 사람은 갖지 못한 시인의 눈을 창고에 보물처럼 쌓아 둔 사회는 저력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밖에서 느끼는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아주 이념적이라는 것이다.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멀다. 과잉 이념, 전쟁 같은 논쟁 역시 뿌리 깊은 유산이다.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것을 용납하고, 건설적으로 토론을 끌어가는 전통은 허약하다.

이념 때문에 민족이 쪼개졌던 독일, 베트남, 한국 중에서 한국만 유일하게 분단국으로 남겨진 지 오래 됐다. 거기에 동서로 또 나눠지고, 보수 진보로 갈라져 서로를 극혐하고 있다. 극우도 여의도파, 광화문파로 깨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남북이 하나로 합쳐진 뒤 터져 나올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그걸 다스릴 역량이 되는지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들려오는 한국 소식은 우기의 겨울 날씨처럼 우중충하다. 억지 꼼수 궤변의 세계를 열어 나가고 있는 탄핵 재판정, 높은 어른들의 모습이 비루하고 천하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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