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용현의 산골 일기] 텃밭에서 추억을

2024-10-29 (화)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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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나 호박이 하룻밤 새 3인치씩이나 자랄 때가 있었다. 여름내 눈부시게 내려쪼이던 햇볕과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리고 뜬금없이 ’쏴아‘ 하고 소나기를 내리 쏟던 시절이 지나간다. 많은 작물들이 이제 성장을 멈췄다.

산골에는 4계절이 분명하다. 오랫동안 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 살다 정확하게 석 달에 한 번씩 바뀌는 절기를 겪으면서 마치 중간고사를 자주 치루는 학생처럼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다. 텃밭에서 철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또 모두 뽑아내어 다음번 미래의 작물을 준비하는 등 어설프나마 농부의 생활을 맛보다 보니 인생의 후반기에 내일이 있어 기운이 솟는다.

작물을 키우다 보면 햇볕과 바람과 물이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가를 알게 된다. 계절이 바뀌면서 약해진 햇볕과 바람이야 도리가 없지만 그 대신 물은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수도 물로 지금도 충분하게 뿌려주고 있다. 햇볕과 바람과 물,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정(情)이다. 같은 조건에서도 정을 쏟아 잎 새를 따주고 줄을 매주고 보자기로 싸준 호박이나 토마토는 그렇지 않은 것 보다 훨씬 예쁘고 건강하게 익어간다. 정이 필요한 건 어디 식물 만이랴.


완두콩과 고구마 등 늦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면 텃밭에 추운 겨울이 찾아 올 것이다. 그 텃밭 한가운데서 지난 6월에 피어 10월까지 독야홍홍(獨也紅紅) 하던 맨드라미꽃이 고개를 숙이자 바로 옆 단풍나무가 지체 없이 빨간색을 이어 받는다. 김영랑 시인의 탄성처럼 ‘오매 단풍 들것네’ 하고 화들짝 놀라 산길을 내려가는데 어느 샌가 골짜기마다 단풍이 흐드러지게 물들어 있었다.

10월은 뉴저지의 달이다, 어디랄 것 없이 뉴저지 전체가 단풍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달이다. 올여름은 심한 더위와 부족한 강우량으로 단풍색이 예년 보다 못하기는 했으나 허드슨 강변을 따라 북쪽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여전히 가을 풍경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곳곳의 도로 양옆으로 빨강, 주황, 초록, 연두색 등 현란한 색의 향연이 한창이다. 봄은 아니로되 봄빛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이 가을의 정취라고 했던가.

아름다운 산천, 이 울창한 수풀을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누구도 감히 이 숲속의 평화, 천혜의 자연을 해쳐서는 안 된다. 폭염과 홍수, 가뭄과 혹한으로 이어지는 이상기온으로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식물들이 고사되고 있으며 고산지대 동물들의 생명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기후재앙을 막는 일과 함께 어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 2년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이미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는 1년 동안 민간인만 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의 모든 적대행동도 즉각 중단돼야 한다. 전쟁은 종교, 인종 또는 어떤 이념적인 차이로도 결코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 강 작가가 수상축하모임을 안 하면서 ‘전쟁으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잔치는 무슨 잔치냐’고 했다는 말이나 ‘전쟁은 싸우는 자가 아니라 말리는 자가 영웅이라’고 한 트럼프 후보의 말이 돋보인다. 산골에서 평화를 꿈꾼다.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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