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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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여주의 세종대왕릉

2024-10-04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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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 가면 황금빛 동으로 된 거대한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 동상 밑 지하에는 세종대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세종이야기’ 전시관도 있다. 세종대왕은 재위기간(1418~1450)동안 한글창제를 비롯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한글은 자음 14자, 모음 10자만 기본으로 배우면 쉽게 조합해서 사용한다. 자음은 사람의 발성기관 모양을 본떠서 만들고 모음은 하늘(天,) 땅(ㅡ), 사람(|)을 본떴다. 세상의 어떤 소리도 받아적을 수 있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특징을 지닌 한글은 전세계 유일하게 창제자, 창제동기, 창제원리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 1446년 반포,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가 쓴 서문에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를 마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 지도를 보니 역이름에 세종대왕릉이 있었다. 여주로 가는 경강선 노선이었다. 서울 안에 정릉, 헌릉, 선릉, 태릉, 홍릉, 선정릉 등 수많은 릉이 있고 ‘왕릉은 원칙적으로 도성에서 100리를 넘지 않아야 한다’(임금이 참배하러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고 도감에 적혀있는데 왜 그렇게 멀리 있지했다.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을 생업으로 해왔으니 그 분의 묘소에 가보고 싶었다. 최근에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들과 세종대왕릉을 찾아갔다. 신문사, 잡지사 기자, 대하역사소설을 쓰는 전업작가 등, 평생 한글로 밥 먹고 산 이들이었다.

판교역에서 경강선을 타고 50분 정도후 ‘세종대왕릉’ 역에 도착했고 다시 택시를 타고 몇 분 후 세종대왕릉 주차장에 도착했다.
정자각(제향을 지내는 건물)을 지나 언덕 왼쪽 길로 올라가니 합장된 커다란 능이 나타났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왕인 세종대왕((1397~1450)과 그의 비 소헌왕후의 능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두 개의 석상(혼령이 노니는 곳)이 나란히 놓여있고 문석인(관복 입고 능 주인을 보좌하는 인물)과 무석인(갑옷 입고 능 주위를 지키는 인물), 망주석, 돌로 된 능지기 호랑이,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석양, 석마 등이 보였다. 능 뒤를 둘러싼 한국 소나무숲이 얼마나 훤칠한지 마치 대왕의 비범한 기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곳에는 능선 하나를 이웃하여 한글로 같은 이름인 영릉(寧陵)도 있다.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대왕(1619~1659)과 인선왕후의 능인데 왕의 능이 언덕 위에, 왕비의 능이 아래쪽에 조성되어 있다. 효종대왕은 병자호란이후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대동법을 확대했고 청나라를 치려는 북벌계획도 세웠다.

세종대왕의 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태종은 자신의 사후, 외척이 득세할까 염려하여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 심온을 비롯, 숙부를 역모죄로 참수했다. 친정의 몰락에 가슴앓이한 소헌왕후를 알기에 세종은 마음을 달래고자 사후 합장릉 형태로 조성하기를 바랬다고 한다.

그런데 세종 사후 19년동안 조선 왕실에 피바람이 불었다. 문종에서 단종, 세조로 왕이 바뀌고 세자와 원자가 죽는 등 비극이 계속되자 지관들이 풍수지리상 세종의 묘자리가 좋지 않다고 했다. 조정은 지관에게 명당자리를 찾으라고 했고 결국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여주는 100리 밖이지만 배를 타고 가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세종대왕의 묘가 이전한 뒤로 왕실의 피바람이 멈췄고 워낙 명당인 덕분에 조선의 운명이 100년 정도 더 연장되었다는 설도 있다.

여주시의회는 2021년 12월31일 영릉이 있는 능서면을 세종대왕면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에 모든 도로와 다리가 세종대왕 교차로, 세종로, 세종교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주의 대표막걸리인 ‘능서막걸리’도 ‘세종대왕막걸리’로 상호가 바뀐 것이다.

10월9일 한글날 전후로 세계각국에서 열리는 한글 축제에 참여하는 타인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K드라마와 K팝 등 한국의 대중문화 열풍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있기 때문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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