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잊지 못할 친구이야기

2024-07-19 (금) 방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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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플러싱에서 롱아일랜드 사요셋으로 이사 온 직후다. 솟구친 주목의 머리를 트림중인데, 단아한 단발머리 아줌마가 “한국사람이시죠!”물었다. 아는 이 하나 없어 낯선 섬에 온 듯 사는데 다가온 그 아줌마가, 키도, 나이도 같은 A다. 그 첫 대면이, 내가 좋은 인연들과 아름다운 추억 속에 안주하게 된 시발점인 걸, 당시엔 몰랐다.

A의 부군께선 사업차 한국과 중국을 자주 왕래하셨고, 4년 후엔 내 남편도 일로 LA에 거주하게 됐다. 시간이 비교적 여유롭게 되자, A가 ‘절친’인 J형님 내외분과 나들이 갈 때 “글 쓰는 사람은 많이 봐둬야 한다.”며 동행을 권유했다. 우린 자칭 삼총사로 의기 투합, J형님 부군 덕에 나물, 버섯, 블루베리 채집 원정에 심취했으니, 모두들 푸르른(?) 50대였다.

남편들이 은퇴 후론, A의 부군이 주도하셔서 삼총사 부부가 원정명소탐방에 나섰다. 2009년, A가 주선, 여자들 대여섯 명이 토요 새벽산행을 시작해, 지금까지 진행 중이다. 주로 가까운 콜드스프링 산이나 베스페이지파크를 걷지만, 철따라 멀리 산과 바다로 A차를 타고 가서 눈의 호사를 누린다.


팀원들이 고맙고 미안해 가솔린 값이라도 모아주면, 자기가 가고 싶어 가는 거라며 기어코 대신 밥을 사곤 했다. 또 제일 힘 좋고 건강하다며 순번대로 싸오는 아침보따리도 제 배낭에 나누어 짊어지고 걸었다.

우린 서로의 친구들과도 친해져 모임은 물론, 여행, 라인댄스도 함께했다. 그렇게 ‘이웃이촌’인양 역사를 쌓으며, 자식들 결혼과 손자들 돌보는 소명까지 다 이뤘다. 지금처럼 건강관리에 시간을 투자하며 마지막 삶의 무늬를 채색하면 되는 거였다.

그랬는데 그리 열정적으로 씩씩하게 살던 A가 청천벽력같이 생과 작별할 줄은, 그 누구도 짐작은 커녕 상상조차 못했다. A가 자주 언급했던 말이 “돈으로 해결 될 수 있으면 문제도 아냐!” “인명 재천이야!”였다.

그러더니 돈으로도 불가능한 암 때문에 연기처럼 하늘로 사라졌다. 당당하고 정신력 강해 화끈하게 물리칠 걸 확신했는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마지막 걸음마저 일착이었을까! 만난 지 30년 기념으로 삼총사가 크루즈 타자던 약속도 저버린 채…

마음을 오픈하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의 석별은 처음이다. A를 영영 못 본다는 현실이 도통 실감이 안 난다. 지금도 문간에서 무슨 기척이 나면, “인숙아!”하고 잡채를 불쑥 들이미는 A가 온줄 알고 깜짝 반갑다가 허탈해진다.

멍하지 말고 정신 차려 홀로서기 하자면서도, 어디를 가던 A의 발자취와 빈자리에 가슴이 저려온다. 받았던 사랑보다 줬던 사랑이 적어 미안하고 부끄럽다. 길눈 밝아 운전이 거침없고, 음식 솜씨 좋은데다, 우직하고 답답한 나와 달리 머리회전, 순발력 결단력이 돋보이던 A. 바람처럼 안보여 야속하고, 마음 아프고, 아깝고 아까워 죽겠다.

한낱 타인임에도 상실감의 미로를 헤매는데, 지극정성 병구완하신 부군과 피붙이 가족들의 심상(心傷)과 슬픔의 깊이를, 그 누군들 가늠할까! 오호통재라! 일면, 그동안 병과의 험난한 사투과정을 알기에, 고통 없는 곳에서 환해진 A의 해바라기 얼굴을 떠올리곤 하지만…

<방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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