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멜라니아는 어디 있나

2024-07-17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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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충격적인 암살시도가 일어난 다음날, 아내 멜라니아 여사가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다.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가족들이 보이는 의례적인 성명, “우리 모두 좌와 우, 정치적 견해차를 넘어서 존중과 사랑이 초월하는 세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메시지다.

공화당은 피격사건 바로 이틀 후인 15일부터 밀워키에서 트럼프 후보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고 있는데, 멜라니아 여사가 여기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국내외 언론들이 앞 다퉈 보도했다. 그녀의 참석이 대단한 뉴스로 다뤄지는 이유는 백악관을 떠난 후 은둔해온 그가 실로 오랜만에 공식무대에 등장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멜라니아는 미국 대통령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만큼 특이한 퍼스트레이디였다.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조하며 정무에도 적극 참여했던 대부분의 아내들과는 달리 그는 영부인 역할을 ‘마지못해’ 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2017년 1월 취임했을 때도 그는 남편과 함께 백악관으로 이사하지 않고 아들 배런의 교육 문제를 핑계로 한동안 뉴욕에서 떨어져 살았다. 덕분에 딸인 이방카 트럼프가 대놓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다녔고, 두 사람이 4년 내내 기싸움을 하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패션모델 출신으로서 언제나 멋진 스타일을 연출했던 것 외에 눈에 띄는 대외활동이 드물었던 멜라니아는 퇴임시의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배우자들 가운데 최저 호감도를 기록했다. 그리고 퇴임 후엔 아예 은둔 모드로 들어가 플로리다주 마라라고에 칩거하며 두문불출했다. 지난 3년 동안 마라라고 밖에서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고, 안에서도 최측근 몇 사람 외에는 대면하지 않으며, 사교계 모임들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소식통의 전언이다.

대선의 해인 올 들어 그녀의 부재는 더욱 눈에 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광폭 유세를 벌이는 동안 일체의 정치 일정에 불참해온 것이다. 지난 3월초 ‘수퍼 화요일’을 앞두고 트럼프가 첫 경선지 아이오와주를 열 번 넘게 방문하는 동안 한 번도 동행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현지에서 “멜라니아는 어디에?”(Where‘s Melania?)라는 실종전단지가 뿌려졌을 정도다.

지난 5월 뉴욕에서 트럼프의 ‘성추문 입막음 돈’ 재판이 열렸을 때도 6주 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그 재판은 트럼프가 포르노 배우와 성관계를 가졌던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불편했을 수는 있다. 외도 시점이 2006년 멜라니아가 배런을 낳고 넉달이 지난 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예민한 시기에 가장 가까운 가족이 곁을 지키지 않는 상황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유죄 평결이 내려지던 날도 아들과 딸들은 모두 소셜미디어에 아버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메시지를 올렸지만 멜라니아는 단 한마디 없이 침묵했다.

지난 달 트럼프의 팬클럽이 열어준 78세 생일파티에도 불참했고, 트럼프가 완승을 거둔 대선토론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토론이 끝났을 때 질 바이든이 달려나와 남편을 허그한 후 부축해 단상을 내려오는 동안 트럼프 혼자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번 피격사건을 보면서 멜라니아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달려갔을까? 현장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리 하비 오스왈드가 쏜 총에 맞아 절명했다. 한 발이 목을 관통했고 이어 또 한 발이 머리를 명중시키자 옆에 앉아있던 재클린 여사가 갑자기 트렁크 보닛 위로 기어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남편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뇌수와 조각을 주우려 했던 행동이었다. 그때 입고 있던 핑크색 수트와 모자, 장갑은 물론이고 얼굴부터 다리까지 피투성이가 됐는데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린든 B.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 선서를 할 때 재키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피 묻은 옷차림으로 선서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샤넬 수트는 세탁하지 않은 채 보관했다가 국가보관소에 기증됐다.

1968년 대선에 출마한 JFK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LA의 앰배서더 호텔에서 연설한 후 팔레스타인계 이민자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곁에는 임신한 아내 에델 케네디가 있었는데, 죽어가는 남편에게 몸을 굽혀 속삭이다가 겹겹이 몰려드는 군중을 온몸으로 막으며 남편이 숨 쉴 수 있도록 물러나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일련의 사진 속에 담겨있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신질환자 존 힝클리가 쏜 총에 가슴을 맞고 조지워싱턴대 병원에서 수술 받은 후 목숨을 건졌다. 그때 경호실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딸 패티 데이비스는 병실에서 어머니 낸시 여사가 아버지의 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14일자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회고했다.

“회복된 아버지는 신이 소련과의 냉전 종식을 위해 자신을 살려두었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총에 맞지 않았다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이룬 업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쓴 그녀는 “간발의 차, 단 한발의 총알이 모두의 삶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연약하고 시간은 소중하며 그 선물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각 개인이 어떻게 해석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천운으로 도널드 트럼프는 총탄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 극적인 암살미수 사건이 대선에서 그를 우세한 쪽으로 몰아가는 형국이다. 부디 트럼프를 빗겨간 한 발의 총알이 그와 멜라니아와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미국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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