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여름,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대구의 이용수(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인권 운동가) 할머님께 내려가 며칠 동안 댁에 묵으며 회포와 소망의 시간을 나눈다. 올해도 어김없이 빨리 내려오라는 할머님의 재촉에 서둘러 지난 주 대구를 다녀왔다.
이용수 할머님은 나와는 각별한 인연과 정으로 맺어져있는 사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도 잊지 않고 전화를 주시며 대화를 나눈다. 할머님은 강건하시고 성격도 활달하시며 당신의 의사 표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논리정연하게 잘 소통하시는 분이다.
2007년도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가 미 국회에서 열릴 때였다. 여행에 늘 샤프론과 동행, 우리 집에서 며칠 묵으시는데 당시 나는 청문회에서 발표할 자료 준비하느라 밤을 지새며, 게다가 한국, 일본, 중국 등 많은 미디어 인터뷰에 시달리며 긴장된 시간을 다투고 있었다. 모처럼 할머님이 도착하시던 날, 나는 청문회 마칠 때까지는 할머님을 제대로 돌봐드릴 수 없으니 대충 지내시고, 청문회 마친 후에 뒤풀이를 멋있게 해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보통 노인 같으면 섭섭해 하실 터인데 “오냐, 걱정마라. 준비나 잘 하이소”하며 나를 편하게 위로해주셨다.
오밤중에 너무 배가 고프셨던지 동행한 샤프론이 우리 집 냉장고에서 감자와 양파를 꺼내 된장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드셨다고 이튿날 내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완전 손님대접 엉망이었다. 그래도 할머님은 늘 밝고 명랑하게 깔깔, 주위사람들을 웃기시며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행복 기술자였다. 윤기 있는 낭랑한 목소리에 노래솜씨도 최고, 디스코 춤도 내가 못 당하는 불후의 명장이시다. 나와 둘이 듀엣을 하면 ‘은방울 자매’라고들 한다. 몇 년 전 KBS의 ‘아침마당’에 손잡고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할머님의 억척같은 의지로 얼마 전에는 윤미향 사건을 이끌어낸 분이다.
올해 95세, 할머님이 작년보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 같은 방에서 이불 깔아놓고 자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세상 떠나시기 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어야 먼저 간 동료들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하시며 초조해하신다. 끝없는 투쟁이다.
나는 할머님 덕분에 대구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동대구 역에 내리면 택시 운전사들이 어찌나 친절한지, 짐을 트렁크에 넣어주고, 내려주고, 차 안은 무척 깨끗하며, 앉으면 가족처럼 친절한 대화로 즐겁게 해준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며 오히려 손님들에게 천천히 내리라고 한다. 어느 운전사 아저씨는 방금 야산에서 따왔다며 빨간 머루, 검정 머루를 운전하면서 계속 건네준다.
대구시에 곽병원 원장이 계신다. 그는 의사일 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이다. 게다가 음악 밴드를 구성, 멋진 예술 활동도 하신다. 내가 대구 방문할 때면 무료로 내시경 포함, 종합검진까지 끝내 주신다. 저녁이면 맛있는, 푸짐한 식사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용수 할머님의 건강을 오늘 날까지 책임져 오신 분이다.
외지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식사를 정성껏 대접하고 즐거운 향연을 아낌없이 베푸는 대구의 정스러운 사람들. 대구의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원기는 무엇일까.
토요마당에 갔다. 매주 토요일 아침, 소탈한 음식점에서 대구의 지성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몇 년 전, 나도 이 모임에서 미 국회 일본군 위안부 법안 통과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모임의 주제는 다양하고, 각 분야에서 활동, 봉사하는 내역, 앞으로 해야 할 시대사적 논의가 오고 간다.
토요마당을 마치고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원폭 피해자 2세 고 김형률 추모식을 향해 용수 할머님과 차에 올랐다. 벌써 그리운 대구 사람들, 보고 싶다.
<
서옥자 워싱턴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