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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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2024-05-30 (목) 김영화 토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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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동무 어깨동무’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50-60년에는 장난감이 별로 없어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하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어깨동무 씨 동무, 다리가 아파서 절룩/ 미나리 밭에 앉아라/ 언제든지 같이 가고, 언제든지 같이 놀고/ 해도 달도 따라오고, 다리가 아파도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아라.’

어깨에 서로의 팔을 얹고 이 노래를 부르며 나란히 걷다가 ‘앉아라’ 하면 어깨동무를 한 상태로 다 같이 앉는 놀이다. 하나라도 앉지 않고 서있으면 어깨동무한 팔이 풀어진다. 씨 동무란 농촌에서 씨앗처럼 소중한 동무라는 뜻이다.


이 동요는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나온 전래동요의 하나로 남한 일대에 널리 펴져서 불리었다. 나도 동네 동무들 6~8명이 모여서 어깨동무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 때는 이 놀이 노래가사의 뜻은 전혀 모르고 여럿이 모여서 노래에 맞추어 노는 것이 재미났다.

나는 어렸을 때 마을 동무들보다 나이도 1~3살 어렸고, 키도 작고, 몸이 허약했다. 6~7명의 동무들이 내 책보까지 짊어져주며 나를 제일 중앙에 놓고 어깨동무해 주었다. 나는 중앙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를,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 말하면 나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동무들이 내 말을 따라주었다. 홍수가 나서 개울가에 물이 넘칠 때에도 어깨동무하며 물살을 헤치고 건너며 학교에 다녔다. 내가 물에 빠져 절퍽 앉으면 동무들이 어깨를 풀지 않고 다 같이 앉아서 물에 젖은 생쥐처럼 되었다. 어깨동무 노래처럼 나를 위해 젖어가며 언제든지 같이 가고, 언제든지 같이 놀았다.

어깨동무하며 함께 놀고, 함께 살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만일 동무 중에 자기 새 옷을 더럽히기 싫거나, 물에 젖어 생쥐 같이 되고 싶지 않거나, 감기 걸릴까 두려워서 같이 미나리 밭에 앉기를 거부하면 자연히 어깨동무는 풀어지게 된다. 내 어렸을 때 동무들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도 조건 없이 배려해주며 품어주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사람들은 ‘동무의 어깨에 팔을 얹고 나란히 걷고, 뛰고, 앉으려면 키가 어느 정도는 같아야하고, 서로 공통분모가 있어야한다’라고 말한다. 요즘은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애들도 동무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동네에서 몇 평 아파트에 사는지, 부모가 어떤 일을 하는지 등을 본다고 한다. 그 조건에 들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하니 왠지 땡감을 씹는 기분이다.

오래전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한 어머니의 얘기가 생각난다. 그분을 잘 아는 듯한 학부모가“댁의 아들은 공부도 뛰어나고, 댁은 재력도 있는데 공립학교에서 뵙네요?”했다. 왜 아들을 유명 사립고등학교에 보내지 않고 공립학교에 보내는지 물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공립학교에서 여러 계층의 아이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터득하며, 공부도 동료들과 상부상조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아들이 장성해서 어느 위치에 있던지 자신과 다른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같은 조건을 가졌다고 해서 어깨동무가 쉬워지는 것만은 아니다. 타인을 자기의 눈높이에 맞추도록 하는 것보다, 자신이 타인의 눈높이에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난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한국 나갔을 때 내 어깨동무들이 와서 나를 위로해주고 갔다. 6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지 않고 찾아준 동무들이다.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어렸을 때보다 더 멀고 커졌지만 나를 너무나도 잘 알았던 동무들이 와서 함께 눈물을 훔치며 어깨동무해 주고 갔다. 그 동무들이 많이 그립다.

<김영화 토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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