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덕선 선생의 명복을 빌며…

2024-05-05 (일)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
작게 크게
지난 4월11일 이덕선(Matthew) 선생이 갑자기 타계했다. 새삼스레 인생의 허무함을 절감한다. 오랜 친구인 이덕선에게 ‘선생’ 칭호를 붙이는 것은 그가 ‘선생’ 존칭을 받을 만큼 본인에겐 매우 인색하고 엄격했지만, 남을 위해서라면 진정성 넘치는 헌신과 이타심 가득한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다.

이덕선 선생과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사이이다. 서로 존대하지 않고 말 트고 지내는 스스럼없는 처지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부부동반으로 자리를 함께했는데 그날 따라 이덕선이 자기가 예약을 서둘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고 보니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가 싶다.

그는 플로리다로부터 전화를 걸어 일본, 유럽을 돌아와 만나자고 한게 마지막 통화가 됐다. 그때 평상시와 달리 만나자는 날짜를 정하지 않은게 지금도 이상하다. 그의 사인은 ‘혈액암’이라고 하는데 자신은 이미 병세를 알았지만 주위를 염려하여 발설하지 않은 것 같다고 가족들은 얘기한다.


이덕선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다. 6.25 전란 중 1.4후회 때 서울로 왔다.
천주교 재단에서 설립한 동성 중고등 학교를 다녔다. 고 1학년 때던가 성북동으로 이사왔고 나와 친구가 되어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다. 그는 외국어대 나는 동국대를 다녔지만 어울리는 친구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도 함께 갔다. 논산 훈련소 30연대에서 훈련도 함께 받았다.

그는 6중대 향도였고 나는 후반기 1중대 향도였다. 그와 나는 미국에 와서 다시 만나 인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덕선은 컴퓨터 사업에 전념하고 나는 민주화운동, 한민신보 언론활동에 몰두하여 다른 길을 걸었다. 그랬어도 둘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민주화운동이나 반정부 언론 활동에 엄격히 거리 두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만날 일이 있으면 동포들이 없는 장소나 별실을 예약해 은밀히 만났다. 그것이 그의 순수성을 지켜주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내가 한국서민연합회를 창설, 운영할 때에도 이덕선은 서울에 올 때마다 연락을 해왔다.
이덕선은 부친 이원길(베르나도), 모친 황화순(수산나)의 6남매 중 장남이다. 이덕선은 아버지 이원길씨 외가쪽으로 옛민주당 정부 장면 국무총리의 친인척이다.
장면 총리 막내아들 장흥(마태오)도 프랑스에서 신부가 되어 성직자의 길을 걷다가 포기하고 프랑스 여성과 결혼, 현지에 살고 있는데 이덕선과는 늘 교류하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 근교에 있는 장면씨의 동생, 장극 박사와 가족들은 지금도 함께 성당 활동을 통해 교류하고 있다.

이덕선의 네째 동생 이덕효(바오로) 신부도 St. Jude 성당 신부로 봉직하고 있다.
이덕선씨와 한훈씨는 소피, 패트리샤 두 딸을 두었다. 이덕선의 부인 한훈(Kathernine) 여사도 겸손하고, 검소하고 품위있다는 이웃들의 평을 듣는다.
남편의 사업성공에 내조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국내 가톨릭 구제회에서 이덕선을 만나 인연을 맺은 한훈씨는 66년 미국에 온 이래 IMF(국제통화기금)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무해 왔다.

한훈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3학년 재학 시절 할아버지 한근조 선생의 세계일주에 비서 겸 통역으로 수행하여 언론계의 각광을 받았던 재원이다.

한근조씨는 해방후 초대 평양시장을 역임했고 서울 종로 을구에서 출마, 김두한 후보와 1승 1패를 기록한 후 다시 윤보선 후보(전대통령)을 물리치는 등 제4,5,6대 3선을 기록한 정치인이다. 한근조씨는 일본 메이지대 졸업 후 1922년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유진오, 윤길중씨 등과 함께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한 건국 공로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던가. 이덕선이 하는 사업은 매번 순조로웠고 성공을 거듭했다. 탄탄한 경제 기반이 구축되자 그는 서슴지 않고 사회에 환원했다. 부부의 이름을 딴 ‘Matthew D. & Katherine H. Lee Foundation’을 만들어 자선사업을 하는 한편 수녀원(The little Sisters of the Holy Family)을 오래전부터 지원해왔다 그의 사업은 미 행정부의 중심인 국무부의 전산망을 전담하는데까지 이르렀으나 이덕선은 한번도 한국사회에 자신의 위치를 과시한 적이 없고 늘 검소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왔다. 자신의 모교인 외국어 대학에 4백여만 달러의 거금을 쾌척했다.

외대 박정운 총장이 몸소 찾아와 조문했고 조현동 주미대사 등 외대 출신 공관원들이 장례식장을 방문, 헌화했다.
그의 동포사회 직명으로는 미주지역 외대동창회 이사장, 단 한개 뿐이다. 이덕선은 스포츠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고 식도락가였으며 음주를 즐겼다.
이덕선씨의 일생은 특히 해외동포들의 모범으로 추앙해야 할 멋진 기록이었다고 확신한다.

삼가 이덕선 선생의 명복을 빈다. 친구 정기용 재배.
문의 (511)326.6609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