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인의 달’과 ‘조부모의 날’

2024-04-30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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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조상들에겐 봄철이 보릿고개를 넘는 춘궁기(春窮期)였지만 나에겐 포식할 날이 줄을 잇는 ‘춘풍기(春豊期)’이다. 3월과 4월엔 부부 생일이 이어져 며느리가 모처럼 산해진미를 바리바리 준비해오고, 5월엔 어머니날과 결혼기념일이, 6월엔 아버지날이 각각 끼어있어 외식할 찬스가 많다. 한국에서도 어버이날엔 식당들이 메어터진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포식할 때도 가끔 있다.

한국에선 5월이 ‘가정의 달’로 불린다. 공식적으로 지정된 건 아니지만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성년의 날(셋째 월요일), 부부의 날(21일) 등 가족행사가 몰려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그밖에 근로자의 날(1일)도, 불교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석가탄신일(올해는 15일)도 있다. 스승의 날(15일)도 있고, 기자들의 명절인 언론자유의 날(3일)도 있다. 이래저래 먹을 기회가 줄을 잇는다.

미국에선 5월이 가정의 달 아닌 ‘노인의 달’로 공식 지정돼있다. 정작 노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5월을 ‘Senior Citizens Month’로 지정했고, 2년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명칭을 ‘Older Americans Month’로 바꿔 선포했다. 한국에도 ‘노인의 날’은 있다. 유엔이 정한 국제 노인의 날(10월1일)이 한국 국군의 날과 겹쳐 하루 뒤 10월2일로 밀렸다.


미국엔 한국에 없는 노인 잔칫날이 또 하나 있다. ‘조부모의 날(Grandparents Day)’이다. 별로 지켜지지 않아서인지 대다수 ‘할버이’들이 모르고 지낸다. 5월이 아니고 여름의 끝물인 노동절 다음 첫 일요일(올해는 9월8일)이다. 미국이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따로 정했듯이 폴란드는 1964년 ‘할머니 날’(1월21일)과 ‘할아버지 날’(1월22일)을 따로 정했다. 조부모 날의 세계적 효시다.

아버지날은 6남매를 키워준 홀아비 아빠를 기리려는 한 미국 판 심청이의 노력으로 110여년전 제정됐다. 반면에 조부모의 날은 9세 소년이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할머니-할아버지 날을 지정해달라고 편지를 보낸 데서 비롯됐다. 소년은 닉슨의 비서로부터 “대통령이 특정 기념일을 선포하려면 의회가 먼저 결의안을 통과시켜야만 가능하다”는 짤막한 답서를 받고 좌절했다.

하지만 웨스트버지니아의 마리안 맥퀘이드 여인이 곧바로 소년의 뜻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백악관은 물론 연방의회 의원들과 전국 50개주 주지사, 주요 사회단체들과 기업체 등을 상대로 맹렬하게 로비활동을 벌였다. 결국 노동절 뒤 첫 일요일을 대통령이 조부모의 날로 해마다 선포토록 규정한 결의안이 1977년 연방의회를 통과했고, 다음해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서명해 발효됐다.

그뒤 영국(10월 첫째 일요일), 독일(10월 둘째 일요일), 프랑스(3월 첫째 일요일), 필리핀(9월 둘째 일요일), 싱가포르(11월 넷째 일요일) 등 수많은 국가가 조부모의 날을 정했다. 조부모를 공경하고, 조부모가 자녀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하도록 기회를 드리고, 어린이들에게 어르신들의 풍부한 지혜와 경험, 그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끼친 공로 등을 일깨우게 한다는 것이 취지이다.

미국의 조부모 수는 5,600여만명(2020년 기준)으로 전체인구의 17%를 점유한다. 100년간 1,000% 증가했다. 한국의 조부모는 902만여명(2022년)으로 전체인구의 17.5%를 차지한다. 내년에는 20%를 초과하게 된다. 독일의 한 인구연구소는 전 세계 조부모를 15억4,000여만명(2022년)으로 집계했다. 미국과 영국에선 조부모 중 40%가 정기적으로 손자손녀를 돌본다는 조사내용도 있다.

앞으로 100세 인생시대에 많은 할버이들이 증조부모로 승격할 터이다. 발 빠른 내 고교동창생은 이미 진급했다. 하지만 ‘증조부모의 날’ 지정은 언감생심이다. 장사가 될 턱이 없다. 미국 소매업계는 작년 어머니날에 41억달러, 아버지날에 10억달러의 특수를 누렸다. 손주들이 조부모에게 드리는 선물은 기껏 카드나 재롱이다. 증조부모들은 그마저 기대 못한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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