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법 리스크로 위축된 트럼프

2024-04-29 (월) 제니퍼 루빈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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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 개월 동안 도널드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를 다룬 언론보도는 네 차례 기소된 전임 대통령의 자아도취 성향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그는 자신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2024 캠페인의 호재로 뒤바꾸어 재집권 가능성을 높이려 든다.

지난 8월, 뉴욕타임스는 공화당 대선후보지명전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은 그에게 적용된 숱한 범죄혐의가 정치적 자산으로 바뀌는 ‘물구나무선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전임 대통령이자 차기 대권주자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은 네 건의 기소는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부족함이 없다. 반면 언론의 셀프-패러디로 인해 모든 기사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해가 된다. 로이터 통신이 작성한 분석기사의 헤드라인은 이같은 현상을 정확히 짚어준다. “바이든 캠페인의 최대 악재는 트럼프 재판.” 트럼프 재판으로 피고가 아닌 바이든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다.

얼마 전 PBS 뉴스아워는 뉴욕법원에서 열린 트럼프의 ‘세금사기’ 의혹 재판에 관한 보도를 내보냈다. “이번 재판은 트럼프가 자신이 짊어진 사법리스크를 얼마나 교묘하게 캠페인의 호재로 활용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이다. 그는 네 건의 기소를 자신의 선거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바이든 진영이 치밀하게 조율해 만들어낸 흠집내기 시도로 규정하고, 이를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고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 친화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전임 대통령은 대출사기 의혹을 다룬 뉴욕지법 민사재판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벌금과 함께 두 건의 법정모독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만약 어렵사리 법원에 제출한 보석채권에 하자가 발견되면 곧바로 자산압류조치가 떨어질 수 있다. 언론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는 뉴욕 민사재판 결과를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하는데 실패한 듯 보인다. 패소한 트럼프는 부동산 거부가 아니라 이미 수년 전에 도산한 카지노 운영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뉴욕 민사재판에 이어 맨해튼 지방법원의 형사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언론은 트럼프가 사상초유의 재판에 쏠리는 관심을 선거운동의 원동력으로 역이용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뉴욕타임스는 이번에도 요란스런 헤드라인이 달린 전망기사를 내놓았다. “트럼프와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현기증을 일으킬만큼 대단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트럼프는 법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승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케이블 TV의 패널리스트들 역시 재판을 자신의 이미지 제고 수단으로 활용하는 그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실제로 형사재판이 시작되자 허구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섰다. 재판절차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법원 출석을 지렛대로 활용해 지지자들을 규합하며 그 어떤 법원도 자신을 붙잡아둘 수 없다는 점을 과시하려했다. 하지만 정작 재판이 시작된 이후 그는 나날이 초췌해지고, 나이들고, 솔직히 다소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법정은 트럼프가 아닌 판사가 관할하는 영역이다. 트럼프는 지난주 ‘성추문 입막음 돈’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후안 머천 맨해튼 지법판사로부터 배심원 협박에 관한 훈계를 들었다. 머천 판사는 피고석에 앉은 트럼프에게 재판에서 배제돼 밖으로 나가는 배심원을 향해 상대가 “들을 수 있는” 코멘트를 하거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손동작’을 취해선 안된다며 “본 법정은 그 같은 행위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내가 주재하는 재판에서 배심원이 협박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재차 강조했다.

트럼프는 지난 금요일에도 판사로부터 질책을 당했다. 이날 재판의 끝머리에 트럼프는 이미 폐정했다고 생각했는지 피고석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나가려 했다. 그러자 머천 판사는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단호하게 지시했고, 트럼프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후 머천 판사가 서류를 챙겨 천천히 퇴정할 때까지 약 1분간, 트럼프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머천 판사에게 수모를 당한 후 법정을 빠져나온 트럼프가 성추문 입막음 재판을 비난하는 폭스 뉴스의 인쇄물을 취재진과 지지자들을 향해 흔들 때에도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고, 함구령을 의식한 듯 감히 머천 판사를 조롱하거나 비방하지 못했다. 요즘 그는 거의 매일 법정 피고석에 앉아 판사와 검사가 수시로 입에 올리는 듣기 거북한 ‘불경스런 소리’를 들으며 긴 시간을 보낸다. 법원 밖에서 트럼프가 던지는 짤막하고 무뚝뚝한 발언은 그의 반대편으로 심하게 기운 힘의 불균형을 짐작케 한다. 법정 안팍에서 그는 분명 위축된 듯 보인다. 함구령에 전혀 개의치 않던 이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어 트럼프가 법정에서 잠이 든 것을 두고도 소셜미디어에 조롱 섞인 반응이 쏟아졌고, 심야 코미디 쇼 역시 이를 희화화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바이든의 체력과 에너지를 문제삼던 그가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재판 도중 잠든 것은 대단히 역설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오바마의 보좌관이었던 데이비드 악셀로드는 트럼프의 옹색한 처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법정에서 그는 한낱 형사피고인에 불과하다. 그곳의 절대적인 권력은 트럼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쥐고 있고, 그에겐 엄격한 룰이 적용된다. 법정 스케치가 포착한 트럼프의 지치고 무력한 모습은 작고한 그의 부친이 생전에 그토록 혐오했던 유형의 인간이 바로 자신이 아닐까하는 두려운 각성마저 엿보게 한다. 그게 도대체 어떤 유형의 인간일까? 기소된 형사범일까? 아니, 그보다 한층 혐오스런 존재, 바로 패배자(loser)다.”

트럼프는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한 “언터처블”의 특별한 지위와 힘을 매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 자신은 물론 일부 보수 언론 매체들도 일단 재판이 시작되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잊은 듯 보인다: 전직에 상관없이 법정에 선 트럼프는 그저 평범한 형사피고인일 뿐이다.

재판은 이제 막 시작됐다. 하지만 치욕적인 판사의 훈계와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기나긴 혐의 내용은 이미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트럼프가 코헨을 비롯한 증인들의 증언에 즉석에서 분노를 터뜨릴지 혹은 함구령을 어기며 법정밖에서 계속 이들을 비방하고 협박할 것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물론 둘 다 가능성은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트럼프의 분노 발작이 그가 처한 딜레마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최악의 악몽 한 가운데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자기도취자라면 저렇게까지 초라하고, 지치고 맥빠지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제니퍼 루빈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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