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칼럼] ‘혼자 누리는 자유는 위험하다’

2024-04-22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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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혼자 누리는 자유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리는 자유이다. 혼자 누리는 자유의 대표적 사례는 인간 아담이 추구했던 본능적 자유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리는 자유의 사례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과 17세기 영국 청교도 무리가 추구했던 공동제적 자유이다.

이 두 종류의 자유 사이에 고뇌와 고난으로 가득 찬 인간의 길, 분열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펠라기우스와 논쟁에서 작은 자유와 큰 자유가 있음을 설파한 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유방임적 자유와 합리적인 자유밖에 몰랐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진정한 자유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참 자유를 얻었다.”
(베르쟈예프의 ‘자유’ 중에서)


자유에 대한 무지와 환영으로 인해서 인류는 비참한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이 큰소리치며 우크라이나를 마음대로 유린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무지가 낳은 비극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위험한 착각은 자신과 이웃을 동시에 비극으로 이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이자 살인자인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유는 아담이 가졌던 본능적 자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본능 안에 숨어있는 이기주의가 본능적 자유에 불을 붙인다. 자신이 마치 심판관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자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자유는 마침내 살인을 낳았고 파멸로 이끌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짜 자유인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 소냐는 사회적 약자, 사회적 무명인이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허물이 많았다. 하지만 소냐는 신앙적 자유를 누린 용감한 투사였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소냐는 이타적 자유인이 되었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이타적 자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소냐는 이타적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땅에 떨어져 생명의 씨앗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마지막으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말한다. “나는 비천한 집 출신이나 믿음의 정상에 올라 군림하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당신이 빼앗긴 진정한 자유를 되찾아 돌려주기를 원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혼자 누리는 자유의 추구는 위험하다. 소냐처럼 자유 안에 이타적 사랑이 있을 때, 그 자유는 위험한 이기심의 지뢰밭을 통과하여 숭고한 자리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인간은 회심하고 참 자유를 얻는다. 수도원에서조차도 ‘혼자 있음’과 ‘이웃과 함께 있음’은 확연히 다르다.

예수는 말씀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인간의 자유를 시험하는 것은 존중하는 마음으로 타자를 끌어안는 이타성의 존재여부이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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