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 명소 위기 부른 온난화
▶줄기 일부와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매년 예쁜 꽃 피우며 희망 북돋워
▶ 시민들 ‘스텀피’로 부르며 인기
▶NPS “온난화로 호수 수위 상승해 방조제 개축 위해 나무 제거” 발표
▶“마지막을 함께” 시민들 잇단 발길
▶나무 일부 채취해 유전자 복제 추진
▶워싱턴 벚꽃 만개 역대 두 번째 빨라…정작 미 대선에선 기후의제는 뒷전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밤 미국 수도 워싱턴 남서부 인공 호수 ‘타이들 베이슨’. 벚꽃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물가 나무 약 2,500그루가 봄마다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매년 3, 4월 3주간 국가 주관 전국 단위 축제가 열린다. 평균 약 150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이날은 오는 14일까지 열릴 올해 행사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곳곳이 밤마실 나온 상춘객들로 붐볐다. 호수 건너편으로 금빛 워싱턴 기념탑이, 오른편에 녹색 조명이 켜진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이 보이는 자리에 수십 명이 모였다. 거대한 조형물은 배경일 뿐.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아담하고 어쩌면 볼품없는 한 벚나무의 팬이다. 줄기 일부와 그루터기(스텀프)만 남은, 뭉툭한 나무토막 형상에서 분홍색 꽃이 돋았다. 그 나무답지 않은 나무를 팬덤은 사람처럼 여겼다. ‘스텀피’라는 이름도 지어 줬다.
스텀피는 수상 식물처럼 보인다. 이날 밤에도 뭍으로 밀고 들어온 호숫물에 뿌리가 잠긴 상태였다. 조석 때문에 흔한 일이다. 물에는 소금기도 있다. 많은 벚나무가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만 스텀피는 달랐다. 그래서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시절 스타로 떠올랐다. 끝까지 견뎌 내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북돋았다.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도 퍼뜨렸다. 50대 로버트는 본보 인터뷰에서 “몸통 대부분이 비어 있는데도 스텀피는 매년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며 “역경을 이겨 내는 모습이 감동적”이라고 감탄했다.
▲스텀피 신드롬
하지만 스텀피를 볼 수 있는 것은 올봄이 끝이다. 물에 가장 가까운 벚나무들을 올여름이 오기 전 베어 내기로 국립공원관리청(NPS)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수위가 너무 높아져 방조제 개축이 불가피해졌고, 공사를 하려면 거치적거리는 나무를 없애고 장비가 다닐 길을 내야 한다는 게 NPS 설명이다. 스텀피는 시련을 극복하며 기어코 살아남았지만 결국 동료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맞게 됐다.
그것을 알고 스텀피와 작별하러 온 이들이 많았다. 애인 로이데 마왕가와 이곳을 함께 찾은 40대 클린트 와틀리는 “호수 수위가 올라간 것도, 올해 벚꽃이 이례적으로 빨리 핀 것도 다 기후변화 탓”이라며 “날씨가 변덕스러워 다시 겨울 코트 차림이지만, 온난화는 우리 바로 곁에 와 있다”고 말했다.
NPS의 ‘방조제 수리 및 나무 제거’ 계획은 지난달 13일 발표됐다. ‘내셔널 몰 및 기념공원’ 홍보 담당자 마이크 리터스트는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스텀피의 마지막을 더 많이 함께할 수 있도록 일부러 올해 벚꽃이 피기 전에 알렸다”고 말했다.
전략은 주효했다. 열풍은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스텀피와 오붓하게 기념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야 하는 것이 예사다. 틱톡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플랫폼을 통해서는 동영상이 공유됐고, 고난을 딛고 계속 꽃을 피우고 있는 ‘회복력의 상징’을 굳이 잘라야 하느냐는 항의성 댓글들이 거기에 달렸다. ‘레딧’에는 나무에 자기를 묶어서라도 스텀피를 살리겠다는 ‘광팬’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스텀피 앞에는 ‘스텀피를 구하라’는 문구가 쓰인 손 팻말이 붙었고, 장미꽃과 위스키 술병이 놓였다. 비극이 신화가 되고 있다.
퍼포먼스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 19일에는 사람이 안에 들어간 실물 크기의 스텀피 마스코트가 등장했다. 마라톤 대회 주최 수익금으로 아동 병원을 돕는 비영리 단체 ‘크레딧유니언체리블로섬’이 준비한 이벤트였다. 어린이들이 마스코트를 둘러쌌다. 이튿날은 트럼펫 연주회가 열렸다.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소속 마이클 하퍼가 ‘나무의 세레나데’를 들려줬다. 미국 주재 일본 대사관은 SNS 엑스(X)에 “(스텀피의) 유산이 이어져 (미국과 일본) 미래 세대 간 우정을 키워 나갈 것”이라고 쓰고, 직원이 직접 스텀피를 찾아오기도 했다. 타이들 베이슨 벚나무 숲은 1912년 일본 도쿄 시장이 선물한 3,000그루가 모태가 됐다.
▲ 페어웰 스텀피
스텀피의 수령은 정확하지 않다. 속이 비어 나이테가 없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살가량으로 짐작할 뿐이다. 별일이 없으면 통상 벚나무는 50년 정도 산다고 한다. 20대 초반까지 무명이던 그루터기 형상 나무의 이름이 처음 불린 것은 2020년이었다. 레딧 이용자가 자기 연애 생활만큼이나 죽은 듯 활기가 없다(dead)고 농담하며 사진을 올리고 스텀피라 부른 게 스타덤의 시작이었다. 마침 팬데믹 곤경에 빠져 격리되고 고립된 이들, 특히 약자 집단에는 희망의 단초가 필요했다. 온라인 교류가 활기를 띨 때였고, 연예인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티셔츠로, 모자로, 달력으로, 레고로 스텀피는 대중 속에 파고들었다.
스텀피 전성기의 강제 종료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근처 웨스트 포토맥 공원 벚나무까지 모두 158그루가 스텀피와 같은 신세다. 호수 주변 다른 벚나무와 제퍼슨 기념관 등 문화유산을 오랫동안 보존하려면 방조제 공사 외에 대안이 없다고 NPS는 판단했다.
현재 공원 상황은 심각하다. 조디 액신은 20년 전 타이들 베이슨에서 약혼했다. 하지만 이제는 추억의 장소가 물에 잠겨 발을 딛지 못한다. 그는 미국 공영라디오 NPR에 “물가로 내려가 아이들에게 ‘저 물속에서 너희 아빠와 약혼했다’고 말하곤 한다”고 고백했다.
설상가상이다. 수면은 계속 올라오는데 땅은 가라앉는 중이고, 방조제는 낡았다. 호수처럼 보이지만 타이들 베이슨은 워싱턴을 가로지르는 포토맥강의 지류다. 지구온난화로 바닷물 수위가 상승하면 강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방조제는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사이 지어졌다. 이후 한 세기 동안 기후변화로 호수 수위가 30㎝ 넘게 솟아올랐고, 포토맥 강바닥 진흙을 다져 만든 강 언저리 땅은 150여 ㎝나 가라앉았다는 게 NPS 설명이다. 방조제를 최소 180㎝는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5월 말, 6월 초쯤 착수될 공사는 예정된 기간이 3년이다. 100년을 내다보고 1억1,300만 달러(약 1,500억 원)를 투입한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벚나무 274그루를 새로 심겠다고 NPS는 약속했다. 겨울철 상해 방지 뿌리 덮개로 바뀌어 기존 나무들을 보호하게 될 다른 동료들과 달리 스텀피의 경우 특별히 국립수목원과 협업해 조각 일부를 채취하고 유전자 복제로 자손을 남길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게 NPS 방침이다.
▲ 세이브 스텀피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 인공 호수 ‘타이들 베이슨’의 벚나무 ‘스텀피’ 옆에서 사람이 안에 들어간 실물 크기의 스텀피 마스코트가 춤을 추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 인공 호수 ‘타이들 베이슨’의 벚나무 ‘스텀피’ 옆에서 사람이 안에 들어간 실물 크기의 스텀피 마스코트가 춤을 추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기후변화가 타이들 베이슨에 미치는 영향은 침수뿐 아니다. 지난달 17일 NPS는 X에 타이들 베이슨 벚꽃 ‘만개(peak bloom)’를 알리는 게시물을 올렸다. 3월 17일이면 1921년 기록이 시작된 뒤 2000년과 더불어 역대 두 번째로 이른 절정이다. WP에 따르면 NPS가 예상했던 만개 시기는 3월 23일쯤이었다. NPS가 발표하는 벚꽃 만개는 ‘워싱턴 전체 벚나무 약 3,700그루의 70%가 개화하는 때’를 뜻한다. 2013년 만개는 4월 9일이었다.
이른 개화 자체를 두고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이는 기후가 더 따뜻하고 습하다는 신호다.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클라이밋센트럴’에 따르면 미국 230개 도시의 평균 봄철 기온은 1970년과 지난해 사이에 섭씨 1.2도 상승했다. 같은 기간 워싱턴의 상승폭은 더 크다. 2도나 올라갔다.
그런데도 기후변화 의제는 올해 미국 대선에서 뒷전이다.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책임이 크다. 그의 공약인 ‘어젠다 47’(제47대 미국 대통령 정책 의제)을 보면 그의 재집권은 미국이 ‘기후 악당’으로 가는 길이다. △화석 연료 채굴 규제를 완화해 대폭 증산을 유도하고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파리기후협정에서 다시 탈퇴하며 △전기자동차 이행 목적의 규제를 없앨 공산이 크다. 그가 11월 대선에서 이기면 2030년까지 40억 톤의 온실가스가 추가 배출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온 상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역행은 자신을 ‘미국 첫 기후 대통령’으로 소개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타협을 유도한다. 전기차가 미국 내 내연기관차 생산 일자리를 줄일 것이라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위협하자, 대선 승패를 좌우할 경합주(州) 미시간의 동요를 우려한 바이든 행정부가 차 배출가스 기준 규제 압박을 원래 구상보다 줄인 게 대표적인 예다. 영국 가디언은 “바이든 대통령이 산유량 유지를 비난하는 젊은 진보층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더 걱정하는 중도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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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권경성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