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감투가 사람을 만든다

2024-04-01 (월) 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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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투(坎頭) : 머리에 쓰던 모자 / 벼슬이나 직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
감투를 쓰거나 완장을 차고 직책을 맡으면 처음에는 누구나 그자리에 겸손하게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쳐서 거들먹거리면 감투 쓰더니 눈에 뵈는게 없구나 하면서 핀잔을 듣거나, 조롱거리가 되기도하고, 도깨비 감투처럼 도무지 알 수 없게 일을 하기도 하고, 한여름에 쓴 감투처럼 덥고 거추장스럽다.

작은 감투라도 쓰게되면 조금씩 힘이 세지고 크기가 크면 클수록 권력을 휘두르게된다. 예전에 접시꽃 당신으로 우리를 울렸던 시인이나, 콧수염이 멋지던 말 잘하는 교수도, 햄릿과 전원일기의 연극배우도 정치판에 들어가더니 그냥 똑같은 흙탕물 정치인이 되어 마음 아프게하고, 가장 높은 감투인 대통령이 되어서도 결국에는 감옥으로 가거나 다른 나라로 쫒겨나거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감투에는 힘과 함께 그 무게 만큼 책임도 따르는 것을 알고 처음의 마음을 잃지않기를 바랄뿐이다.

학교생활에서도 무엇이든 잘하는 이는 칭찬 받는 것에 익숙하고 당연해하고 사회성은 조금 덜하다. 그럴때 교사가 잘하는 것으로 누군가를 도와주도록 하는 00부장이란 감투를 주면 좋은 효과를 낸다. 공부를 잘하는 이는 학습부장으로 삼아 주요과목 총정리를 하게 하면 적어도 전 과목 빵점은 막을 수 있고, 운동과 싸움을 잘하는 친구와 짝을 이룬 몸치는 신체검사에서 씩 웃으며 팔굽히기와 매달리기도 하고, 노래를 잘하는 이와 함께하면 음치가 꾀꼬리는 못 돼도 개구리 울음노래가 나오게 하고, 화려하게 멋부리고 잘난척 짱이라면 멋지게 꾸며진 교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감투의 힘이다.


교사라는 감투를 벗어버리고 은퇴한 친구들이 모이면 이젠 우리도 유행어나 줄임말 비속어도 쓸 수 있고 때로는 욕도 할수있는 자유를 누리려한다. 그렇게 막나가다가 그래도 넌 남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하면 그만 깨갱하고 수그러들어 교사들은 때가 덜 묻어서 사기꾼 되기는 틀렸고 오히려 사기꾼이 노리는 먹이감이란다.

어디서나 비즈니스를 하려면 말재간과 알랑방구가 필요한데, 이런게 전혀 없는 월급쟁이 남편이 미국에서 여러가지 감투를 쓰게 되었다. 미국회사를 다니며 머리에 쥐나도록 공부하여 여러가지 자격증을 따고 자리를 잡고나자 도움을 준 한인회 기술학교에 고맙다고 처음으로 실기교사 감투를 쓰고, 봄 가을 학기에는 밤늦께까지 수업일정에 따라 실습자재를 챙기고 간식까지 챙겨간다.

나이와 상관없이 선생과 제자로 만난 관계는 이해관계가 적어서 학교에서 만난 이들과는 수업이 끝나도 의논을 하거나 문제가 있다면 자다가도 벌썩 일어나 무엇이든 알려주고. 눈썰미 좋은 처남과 공대나온 조카에게도 가르치는 도움을 주어 자격증도 따게하고 함께 일하니 성실하고 일감도 많아서 가족들을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며 선생이란 감투를 보람있게 즐긴다.

나이가 들면서 현장에서 일할때 힘이 들때쯤 그동안의 노력으로 기술직 공무원 감투를 쓰게 된 뒤에는 자신은 미합중국의 공무원이라며 자존감이 강하다. 경상도 남자답게 과감하게 차선을 바꾸거나 과속으로 티켓이 일년에 몇번은 날아왔는데, 커다란 픽업트럭 회사 차로는 몇년째 벌금이 안 날아오니 공무원이라는 감투가 대단하다.

다음으론 어찌저찌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무릎수술을 하면서 마누라 소원대로 남편은 영세를 받았고, 넘어지면 골치 아프니 두 손 꼭잡고 다니기로 했지만, 지팡이랑 모든 걸 다 갖고 한참 앞서가다 어디갔냐며 뒤돌아 온다. 성당과 구역모임에도 잘 나가더니 비어있는 구역장 제비뽑기에 당첨되어 구역장 감투를 쓰게 되었다.

올해는 우리 성당이 50주년이라는데 아이고 어쩔거나며 불안해하는 모두에게 남편은 앞으로 자기는 평신도 중에서 제일 높은 사목회장을 하려고 했는데 일단 구역장부터 해보겠다고 큰소리로 감투를 떠안았다. 몇날 며칠 동안 넘겨받은 서류로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며 프린트해서 버린 종이가 한가득이다. 가로 세로가 정확하지 않다고 애꿎은 나를 닥달하길래, 이건 공사견적서 내는거랑 달라서 구역모임은 인간들이라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거라 설명해준다.

성당 점심봉사 메뉴가 깍두기와 육개장으로 정해진뒤 월요일부터 비장하게 깍두기를 담으러갔다. 칼질 해 본적 없는 이가 무와 온갖 야채를 씻고 자르고 썰고 버므려 흐믓하게 담가놓고, 그날밤은 집이 떠나가게 코를 골고, 주중엔 잘 익었나 몇번이나 맛보러간다. 이렇게 적당하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감투를 쓰고 완장을 차게되면 웬만하면 잘 굴러가고 책임감있게 일을 할 수도 있다.

<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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