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쿠바에서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2

2024-03-24 (일) 강창구 전 워싱턴 평통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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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2
이 글은 한국과 쿠바가 수교(2024.2.14) 전이던 2023. 8/14~8/18까지 쿠바를 방문한 현지 기록입니다. 민주 평통 워싱턴 회장 재임시 미주협의회 차원의 방문단 일원으로 방문하였고, 글의 말미에는 193번째 수교국이 된 걸 계기로 한반도통일에 대한 상념을 조금 보태고자 합니다.


4. 카오스 : 혼돈
​이튿날, 그러니까 도착 다음 날인 8/12일(토)은 이번 행사의 가장 중요한 날이다. ‘쿠바 한인들과 함께 하는 광복절 78주년 경축식.’ 원래 쿠바 한인사회에서는 3.1절 기념식을 계속 거행해 왔다고 한다. 그게 해방이 된 뒤로부터(?) 광복절 기념식으로 바꿔 행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다.

모두 여독도 있지만 전날 버스에서 미리 나누어 준 흰색 쿠바 전통 복장도 갖춰 입고서 잔뜩 긴장하고 버스에 도착해 있는데 어제 공항에서도 가장 뒤늦게 도착한 그 ‘워싱턴’이 오늘 아침에도 안 보여서 버스가 출발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다시 어젯밤으로 되돌아가 보자. 늦은 밤 도착해서 남국의 열기를 맞으며 식사 도중에 오랜만에 만난 선배 한 분과 호텔 로비에 있는 바(bar)에 갔다. 소주나 즐기던 그가 ‘RUM’, 쿠바에서 즐기는 모히또(Mojito)의 일종으로 미국에서도 각종 양주로 개발되어 흔히 구입할 수가 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신 이 선배님은 공짜로 주는 럼주는 싫단다. 기어코 오랜만에 만난 착한(?) 동생과 공짜 술은 패스하고 귀한 21년산 조니워커 블랙을 기어코 권한다. 그 뒤로도 몇 잔…. 그리고 밤에 별채에 마련된 숙소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로비에서 숙소·호수를 보여주며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한참을 오른쪽 왼쪽을 꺾더니 도저히 안 되겠던지 짐 나르는 사람을 붙여준다. 그를 따라서 쿠바의 호텔 구석구석의 비슷비슷한 별채들을 돌고 돌아서 방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 나서 내 방을 찾아가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카톡으로 진행자에게 여차저차를 보냈지만 쿠바에서는 호텔이라도 건물만 벗어나면 셀폰이 불통이다. 물론 아주 비싼 요금(하루 $100, 의사월급이 $50)을 낸다면 미국에서처럼 사용할 수가 있다. 청소하는 사람, 지나가는 호텔 종업원, 이웃 투숙객들을 붙잡고 묻고 같이 찾아보다가 결국 자포자기하고 호텔 로비에 있는 버스로 다시 갔다. 모두 늦었지만 환영해 준다.

진행자가 아주 침착했다. 다시 150미터 떨어진 숙소까지 호텔 종사자와 함께 방에 데려다 줬다. 어젯밤 럼주 문제인가, 숙소문제인가, 내 나이 탓인가,​
10분이나 늦게 출발해서 도착한 곳이 카르디 네스(cardenas)다. 아침에 설쳤던 것은 벌써 잊어버리고 많이 설렌다. 거기에서 100년 전의 그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앞선다.

5. 쿠바에서 아리랑을 부르다
​쿠바의 한인 후손들이 두 번째로 많이 살고 있다는 카르디네스. 100년 전이던 1921년,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서 4년간의 처참한 노예생활 계약을 필사적으로 살아나서 마친 한인들 중에서 돌아갈 조국이 없어져 버린 마당에 쿠바는 살기가 더 낫다는 생각에 300여명이 쿠바행을 택한다.

맨 처음 마탄사스에 상륙했다가 왜 약 25마일 떨어져 있는 작은 항구도시인 카르디네스로 또 이동하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도시에 들어서니 도시구획은 좌우로 아주 잘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마차다. 말 한 마리에 앞자리에 마부가 타고 뒷자리에 2명이 탈수 있는 그런 구조인데 가장 흔하게 보이는 교통수단이었다. 쿠바의 길거리는 이제 눈에 익어 가지만 이곳도 마찬가지로 벗겨지거나 퇴색한 벽과 지붕, 새 건물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감가상각’ 그렇다. 유럽에서도 주로 그런 분위기들을 보게 되는데 어느 순간에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 화려했음을 짐작케 하는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부지 부식 간에 성장을 멈추고 쇠해가는 모습이 역력한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는 현지에서 오래 사는 사람들은 잘 느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행사장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흥분이 된다. 어떤 모습들일까, 한국말은 어느 정도일까, 말이 통해야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가냘픈 기억이라도 서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차에서 내려서 골목길을 몇 구비 돌아서 약간 넓은 건물에 들어섰다.
후덥지근한 날씨인지 약간 덥다는 느낌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에어컨 시설이 있는 건물까지를 준비해둔 실무진에 감사할 일이다. 막상 행사 중간까지 에어컨이 작동이 안 되다 보니 여간 미안해한다.

​드디어 만났다. 그립고 그리운 우리 민족, 동포, 우리 핏줄들,... 찬찬히 뜯어봤다. 나이가 70이 넘어 보이는 분들에게는 확실하게 우리 누이, 형님들의 모습들이 보였다. 피부도 콧날도, 머릿결도…. 좀 더 젊은 그룹으로 내려 갈수록 피부도 엷어지고, 머리칼도 색변하고, 마치 김동인의 신소설 ‘발가락이 닮았다.’가 연상되듯이, 나와 우리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구석들을 보고 또 살폈다. 마지막으로 눈동자까지를 들여다봤다. 모두 다 내 가족 우리 핏줄들이었다. 이분들끼리 서로서로 연대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10시간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는 이야기에 눈물이 왈칵 한다.

물론 가져간 선물을 받기 위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분들이 그 먼 곳을 1년에 한번 혈육들(?)을 만나러 온다는 것은 100년 전 애니깽 후손들이 잃어버린 조국에 섬섬옥수로 보냈던 독립자금과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쿠바의 시골 어촌 카르티네스의 공회당에서, 그리고 스페인어(현지 언어)와 한국어로 통역되면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도 이어진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순간인가. 나는 묵념 때마다 도산 안창호의 독립정신을 상기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헤로니모 임’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 기도했다. 이어서 아리랑을 힘차고 슬프게 목청껏 불렀다. 마지막으로 만세 삼창을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만세, 쿠바 한인 만세!’를 선창한 것이다.

​더운 곳에서 음식들을 서로 나누었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그분들의 눈동자를 거기에서 보았다.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를 만나러 갔다. 헤밍웨이가 어떻게 해서 쿠바에 정착하게 되었고, 쿠바의 자연을 유달리 사랑했던 그는 혁명가 카스트로 정권의 회유에는 일정한 거리를 끝까지 유지한다. 그 세세한 부분은 미국과 쿠바간의 역사, 문화, 경제적 변화와 밀접하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어촌 해변가가 내려다보이는 그의 저택과 불행했던 결혼, 사랑했던 4명의 딸과 2마리의 강아지 등의 흔적을 돌아봤고, 그의 작품이 태동한 해변가에 세워진 그의 기념조형물들을 돌아봤다는 정도의 보고만 올린다.
<다음에 계속>

<강창구 전 워싱턴 평통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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