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랍 국가들이 변하고 있다

2024-03-18 (월)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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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또 다시 터진 전쟁을 지켜보노라면 절망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중동 전역은 여전히 폭력과 불안정에 짓눌린 듯 보인다. 그러나 가자에 눈길을 집중하다보면 중동의 미래를 낙관하게 만드는 최근의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된다. 중동을 이끄는 아랍의 주요 국가들은 현재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중요하고도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천지개벽 같은 변화다.

수십 년 전, 아랍세계의 아젠다를 정하는 국가는 이집트였고, 그 중심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버티고 있었다. 나세르의 핵심 이념은 반이스라엘 정서로 채워진 아랍 민족주의였다. 아랍권의 강대국으로 꼽히던 시리아와 이라크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그 어떤 양보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거부주의’를 수용했다.

이슬람 2대 성지 가운데 한 곳을 품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과의 싸움에 종교적인 색채를 덧씌웠다. 지난 2002년, 파드 사우디 국왕은 테러리스트들을 포함해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당한 팔레스타인 ‘순교자’ 유족을 돕기 위한 TV 자선캠페인을 재가했다. 당시 텔레톤 모금액은 1억 달러에 육박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주도적 위치에 서있던 아랍세계의 다른 국가들 역시 이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여기서 비롯된 첫 번째 변화는 중동지역을 이끄는 주역들의 교체다. 과거에는 대체로 몸집이 큰 나라들이 중동권의 리더 역을 맡았다. 오랜 역사와 국토 면적, 군사력 등을 바탕으로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동의 아젠다를 정하는 나라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올린 걸프국들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왕년의 중동대국들은 걸프 연안의 부유한 이웃들이 제공하는 재정지원과 기부금에 의존해 근근이 나라살림을 꾸려간다. 두 번째는 아랍권 전역에서 감지되는 태도 변화다. 이제 이들은 이스라엘을 향한 ‘아랍 테러리즘’을 거부한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동권의 새로운 화두는 ‘화합’과 ‘인정’이다.

엄청난 국부를 자랑하는 걸프국가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지향성에 변화를 주었다. 최근 아랍 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방문을 통해 필자는 걸프연안국의 엘리트들이 중동지역의 전쟁과 불안정을 극도로 우려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끊임없이 촉수를 움직이는 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점차 잠재적인 ‘경제 동반자’로 비쳐지고 있다. 걸프국 중에서도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현대화’에 강한 의지를 보인다. 중동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테러는 이 같은 계획을 물구나무서게 만들 뿐이다.

이집트의 변화는 특히나 중요하다.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은 집권과 동시에 수천 명에 달하는 무슬림 형제단 회원들을 교도소에 감금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스와 깊숙이 연결된 이슬람주의자 단체다. 시시는 하마스는 물론 그와 유사한 무장운동 단체에 깊은 적대감을 보인다. 이스라엘과 연합해 이들을 쓸어버리고 싶어할 정도다. 이집트와 걸프 아랍국들 사이에 엿보이는 태도변화의 뒷면에는 이란과 헤즈볼라에서 후티스와 하마스에 이르기까지 이란이 후원하는 무장세력을 향한 깊은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요인들이 한데 얽혀있다. 카타르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 카다르는 하마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이스라엘과도 오랫동안 협력 관계에 있었다. (카타르는 2009년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격하자 양국 사이의 상호협력 관계를 단절했다.) 카타르는 하마스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종종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 카타르의 중재 없이 하마스와의 휴전이나 평화협상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카타르 정부는 그동안 협상의 중재자로서 지극히 건설적이고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다.

아랍국가의 정부와 아랍인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지금 아랍세계의 여론은 이스라엘과 미국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들을 향한 비난의 수위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닥 희망의 빛이 숨어있다. 지난해 11월, 카네기 인다우먼트의 학자인 아므르 하므자위의 지적대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아랍인들의 태도는 과거에 비해 한결 온건해졌다. 이들은 민간인 피해와 관련해 양측 모두를 비난한다. 테러리즘을 거부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에게 ‘두 국가 해법’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하므자위는 이같은 현상이 정치적 폭력과의 광범위한 결별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최근에 실시된 서베이에서 아랍인의 평균 90% 이상이 극단주의자 조직을 거부하고 테러리즘을 비난했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역에서 벌이는 군사행동의 범위와 수위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중단한 아랍국이 단 한 곳도 없는 이유다. 심지어 이스라엘군의 강공 드라이브를 겨냥한 아랍국들의 공개적인 비난도 다소 누그러졌다.

대신 아랍국들의 관심은 휴전협정, 지원물자 보급로 개설과 전후 복구 등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안에 집중됐다. 물론 최종목표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로 모아진다.


이들을 상대하는 미국 관리들은 필자에게 “많은 아랍국가 지도자들은 건설적이고 유용한 팔레스타인 해법을 찾는데 열심”이라고 말했다. ‘두 국가 해법’으로 연결되는 사우디 주도의 계획은 실질적이고, 실행가능하다.

아랍 지도국 교체와 각국 지도자들의 변화된 태도만으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이슈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는 중동지역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평화와 안정 및 절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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