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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2024-03-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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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주미엽(1923년생·101세)

이 글은 한국과 쿠바가 수교(2024.2.14) 전이던 2023. 8/14~8/18까지 쿠바를 방문한 현지 기록입니다. 민주 평통 워싱턴 회장 재임시 미주협의회 차원의 방문단 일원으로 방문하였고, 글의 말미에는 193번째 수교국이 된 걸 계기로 한반도통일에 대한 상념을 조금 보태고자 합니다.

1. 만남

아바나 공항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안전하게 랜딩하자 승객들이 박수를 친다. 안전한 비행에 대한 답례의 박수로 생각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모른다. 대중은 이렇게 환경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의 선택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운명은 순간에 결정된다. 역사도 그렇다. 비행기가 계류장으로 접근하더니 복도식 공중 게이트가 고장이라면서 비행기 뒷문으로 내리라고 한다.


문이 열리자 뜨거운 남국의 열풍이 확 덮쳐온다. 40여 년 전 회사 생활 시작하면서 송정리 광주비행장을 통해 김포, 제주를 오갈 때 이용했던 방식이 생각났다. 비행기 트랙을 오르내리는 일, 트랙 문 앞에서 늘씬한 스튜어디스가 허리 꺾으면서 인사하던 때의 우쭐함(?)도 잠시 승객들이 모두 내렸는데도 두개로 연결된 셔틀버스가 상당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밖에서는 나를 기다리는 일행들의 기다림이 초조로 변하고 있을 텐데도….

버스가 도착한 곳은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또 다른 터미널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상 큰 짐이 필수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터미널과 미국 터미널의 수화물 픽업 시간은 약 3~5배의 차이가 있다는 주관적 경험이다. 미국이 그만큼 느리다. 그렇다면 쿠바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미국보다 아주 많이 느리다. 기다리는 동안 약간의 걱정을 했다. 워싱턴 레이건 공항에서 마이애미를 경유하기 위해서 아침 5시에 집에서 나섰다.

그런데 그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어쩌면 이번 여행을 포기할 직전 상황까지 생길 뻔했다. 그 설명은 또 길어져서 생략하겠지만 쿠바에 갈 때는 4시간 전에 공항수속을 시작해야 한다. 9:25분발 마이애미행을 타고 도착해서 보니 원래 1:45분 쿠바 아바나행 비행기가 3:49분 비행기로 바꿔져 있다. 그리고 지금 아바나의 주 터미널도 아닌 제3터미널에 서서 쿠바 한국학교와 주미엽 할머니에게 드릴 학용품, 생필품 등이 들어 있는 가방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이다. 과연 물건이 나올 것인가?

얼마가 지났을까. 에어컨이 없는 터미널 화장실에 가니 화장지가 없다고 했더니 공항 직원이 조금 준다. 아무래도 팁을 줘야 할 것 같다는 체화된 자본주의 눈치가 작동했다. 다행히 대형 이민 가방의 짐이 보였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나가서 둘러봤지만 기대하고 있던 기다리는 분들이 보이지 않는다. 전화기가 먹통인 상태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또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떤 한국계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순간 ‘조심해야 된다.’라는 조건 반사적인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다. 주머니에서 명함을 건네준다.

‘임운택(Nelson Lim)’ KOTRA근무, 더듬더듬 한국말을 한다. 이렇게 쿠바와 만났다. 나중에 이번 여행 기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될 ‘쿠바, 한인 후손, 마탄사스, 쿠바혁명, 자본주의, 경제와 정신, 해외동포, 역사’등의 실마리가 될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2. 선택

Nelson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전화기 너머에서 밝고 빠른 목소리의 한국여성이 전화를 받더니 깜짝 반긴다. 정효현(쿠바 한국문화원 원장, 한국학교 교장, 민주평통 중미카리브협의회 쿠바 분회장)이다. 몇 마디 오갔다. 순간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짧게 통화를 마쳤다. 버스가 급히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넬슨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할머니를 마중 나왔다는 더듬거리는 한국말, 영어가 전부다. 쿠바의 언어는 스페인어다.

나를 마중 나오러 온 것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차차로 이야기하겠지만 필자의 고향 땅과 불과 5마일 거리에 있는 전남 해남 우수영 출신 주환옥 님이 1905년 멕시코를 거쳐 2021년 쿠바의 미탄사스로 와서 1923년 주미엽 할머니를 낳고, 올해 100세가 된 주미엽 님을 2023년에 쿠바의 아바나에서 필자와 만난 것처럼 넬슨이 그 시각에 아바나 공항에서 나와 조우할 확률은 그만큼 희박했던 것이다.


쿠바의 면적은 남한과 거의 같지만 인구는 약 1,200만명, 남한 인구의 1/4정도다. 그중 한인 후손이 약 1천명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쿠바 한인’들이라는 표현보다는 ‘한인 후손’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1905년 제물포항에서 1,033명을 실은 멕시코 애니깽 농장 이민자들은 항해 도중 30명이 사망하고, 멕시코 동남부의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쿠바와 가장 가까운 멕시코 땅이다.

운명에는 선택과 강요가 있다.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의 이동은 당시의 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선택이라고 생각할 공산이 컸지만 나중의 역사는 선택을 가장한 강요에 의한 사기라는 게 일반적인 정리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들려오는 ‘미국에 가면 돈나무에서 돈을 딴다.’라는 말은 삽시간에 해남 우수영까지 전해졌던가 보더라. 멕시코가 어디인지, 미국과 비슷했을 거라는 막연한 판단, 무슨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 당시로는 상상이 전무했다.
고향산천과 조국을 등지고도 남을 만한 일당 35전의 위력이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뙤약볕 아래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용설란 가시와 사투를 벌여서 일당을 벌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눈앞에 놓여진 현실이요 운명이었던 것이다.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그나마 살아야 남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고 그렇게 4년 계약을 마쳤지만 돈 벌어서 돌아갈 조국은 없어져 버렸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3. 이동(이민)

버스에 타고 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반긴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12시쯤이라고 하니 북남미 각지에서 모인 20여 명의 일행들이 6시간 이상 맨 뒤에 내린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버스 안은 안락하고 시원했다.

수도 아바나에서 숙소가 있는 바라 대로(VARADERO) 휴양지까지는 약 2시간30분을 더 가야 했다. 쿠바에서는 가장 좋은 도로라고 하는데 차선이 지워져서 희미한 편도 2차, 왕복 4차선 도로를 중국산 신형 버스는 미국 더러 보라는 듯 씽씽 달렸다.

이윽고 여태까지 왔던 도로와 달리 주변이 정리되어 있는 곳에 접어들었다. 차에서 내린 시간이 밤 9시인데도 체감온도는 화씨100도(섭씨 35도)가 넘는 듯하다. 버스 짐칸을 가득 메운 수화물 가방을 모두 호텔 로비에 모아 놓으니 로비가 비좁다.

각종 제재로 외부로부터 송금이 안 되는 것은 물론 해외 배송도 안 된다.

입국 목적에 ‘Helping for cuba people’(쿠바 구호 목적)이라야 무난하다고 사전 안내를 받았지만 왜 이렇게 직접 이민 가방들을 바리바리 가져와야 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다. 사람 수보다 가방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가방 크기들은 또 얼마나 큰지 쿠바 최고의 호텔 로비임에도 에어컨이 안된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야 했다.

여권을 함께 모아서 체크인하라고 맡겨 두고 로비 옆 식당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시원하다. 집 떠난 지 16시간 만에 음식을 놓고 앉았다. 호텔의 아무 곳에서나 술이 공짜로 제공되고 있었다. 우선 목이 탄다. 마셨다. 그런데….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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