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일 청소부

2024-03-01 (금)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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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빅베어 산장에 가게 되었다. 스노 체인을 챙기고 갖다 놓을 짐을 싼다. 스노 체인은 한 번도 채워 본 적이 없어서 유튜브를 보며 체인 채우는 법을 숙지한다. 빅베어에서는 겨울철에 스노 체인을 항시 지니고 다녀야 한다.

그동안 산장에는 여러 번 다녀왔지만 이렇게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다. 처음에는 어지럽고 어렵기만 했던 꼬불꼬불 산길도 이제는 긴장하지 않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운전해 간다. 두 시간 남짓 달렸을까. 높은 산에 오르니 공기가 다르다. 바람 좀 쐬어 볼까 싶어 창문을 내려 본다. 산 아래보다는 확실히 차가운 공기지만 산공기의 상쾌함에 찬 바람도 참을만하다. 팔도 살짝 내밀어 산을 내 손안에 한 움큼 쥐어 본다.

플레이 리스트 속 노래가 한 바퀴 돌아갈 때쯤 산장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활짝 연다. 속이불, 겉이불을 걷어 빨래부터 돌리기 시작한다. 새로 빨아온 시트와 이불을 탈탈 털어 각 침대에 씌우고 예쁘게 모양을 잡아 본다. 둘이 하면 손쉽겠지만 혼자서 하려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새하얀 침구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빨래가 다 되었다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온다. 깨끗하게 빨린 이불을 다시 건조기에 넣고 집안 여기저기 쌓인 먼지들을 털어 본다. 집에서 가져온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 두고 손님들이 마실 차와 커피를 채워 넣는다. 더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살피고 고민해 본다.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린다. 벌써 두시가 다 되어 간다. 찬장에서 컵라면을 하나 꺼내 뜨거운 물을 붓는다. 안에서 먹을까 하다 창문 너머 들려오는 새소리가 나를 바깥으로 불러 낸다. 덱으로 향해 본다. 햇살이 따뜻해서 덱에 있는 간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설경을 뒤로하여 인증숏을 하나 남겨 본다. 스위스 알프스산은 가보지 못했지만 산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상상 속 그 라면 못지않게 노동 후 먹는 컵라면 맛이 일품이다. 얼굴 위로 빛이 스미고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잠시 뒤 건조기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런드리룸에서 갓 나온 이불을 고이 접어 클로젯에 넣어 둔다. 소파에 이리저리 어질러진 쿠션들과 블랭킷들을 정리하고 파이어플레이스에 타다 만 재들을 잘 걷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가구 밑도 꼼꼼히 살피며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인다.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우고 변기와 세면대, 샤워 부스도 쓱싹쓱싹 닦아 광을 낸다. 바닥 걸레질도 마쳤다.

마지막으로 이전 손님이 선물해 준 디퓨저를 뜯어서 거실 한편에 두었다. 은은한 향이 온 집안에 퍼져 나간다. 매 손님마다 작은 선물을 준비해 두지만 이렇게 받기는 처음이다. 예쁜 마음이다.

쓰레기통을 다 비우고 오늘 일일 청소부의 모든 임무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전기 콘센트가 잘 뽑혀 있는지 점검하고 히터를 끄고 창문들을 닫고 커튼을 치고 현관문을 나선다. 혹시나 잊은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 풍경이 눈에 와 콕 박힌다. 몸은 힘들었지만 다음 손님이 들어와 좋아할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삐죽삐죽 웃음이 난다.

이것저것 살필 것도 있고 청소비도 아껴 보고자 먼 길을 달려왔지만 아끼는 것들을 어루만지고 보듬는 과정에서 나도 잠시나마 육아에서 손을 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매일 하라면 못하겠지만 이렇게 가끔 콧바람도 쐬고 드라이브할 겸 산에 올라와 청소하는 일정도 나쁘지 않겠다.

산을 내려가는 길목에 노을이 마중 나왔다. 완벽하게 멋진 하루의 끝자락이다.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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