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육감의 세배 받기

2024-02-28 (수)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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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음력 설날에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감을 한 토요 한국학교로 안내했다. 학교 측에서는 원래 나에게만 학생들 수업 모습도 둘러보고 학생들로부터 세배를 받지 않겠느냐고 문의가 왔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교육감과의 정기회동 때 혹시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두말없이 나의 제의를 받아드렸다.

나는 그 학교를 언젠가는 방문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왜냐하면 그 학교는 공립학교를 빌려서 수업을 진행해왔는데 몇 가지 이슈를 놓고 학교 측과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을 때 다행히 내가 가교역할을 맡아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 절충할 수 있었다. 이 마찰을 내가 교육감에게 직접 얘기했었다. 그래서 교육감도 그 학교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워싱턴 지역에 상당수의 토요한국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누차 언급했고, 한국학교와 공립학교 사이에 협력의 필요성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 방문은 1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숫자만 280명 정도가 되고 교사와 보조교사가 각 20명가량 되는 제법 큰 규모에 놀란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문화의 일면을 체험할 수 있어 유익했을 것이다.


페어팩스 카운티로 오기 전 워싱턴 주 시애틀 시의 외곽에서 교육감으로 일했던 이 백인 여성 교육감이 세배를 받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한국인들의 문화에서는 어른에 대한 공경이 중요시되는데 세배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그러한 공경의 표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전통예절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세배는 단지 가족들 사이에서만 하는 게 아니고 학생들이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 하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만큼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공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니 그 뜻을 이해하는 듯했다.

세배는 복도에 자리를 차려놓고 앉아서 받았다. 나야 양반다리에 익숙하지만 교육감은 바닥에 앉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 그룹의 학생들이 세배를 하고 떠나면 다음 그룹이 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양다리를 쭉 펴보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차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다른 문화를 배우는데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교육감이 그날 배운 또 다른 하나는 세뱃돈과 덕담이었다. 세뱃돈은 내가 봉투에 미리 준비해온 것을 교육감에게 일부 나눠줘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배를 받은 후 학생들에게 새해에 기억해야할 좋은 말 몇마디를 어른들이 해준다고 하자 참 좋은 문화라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세뱃돈에 대해 미안했던지 나한테 나중에 갚겠다고 했다. 물론 그럴 필요 없다고 답하면서 내가 가지고 왔던 세뱃돈에 대해 설명을 보탰다.

“사실 약 2년전 토마스 제퍼슨 과학고등학교의 체육관을 내 이름으로 명명하는 축하식이 열렸다. 그때 지역 한인사회의 한 어른이 복주머니를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그 안에 2불짜리 신권이 50장이나 들어있었다. 그 분은 은퇴하신지도 여러 해 되어 수입도 없으셨다. 연세도 내 부모님 또래였는데 참 고마웠다. 그 돈은 그동안 아까워 쓰지 않고 복주머니에 그대로 넣어 두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복주머니를 열어 그 어른이 나에게 주시고자 한 복을 어린 학생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 나 나름대로도 참 흐뭇했다.”

이런 내 설명을 듣는 교육감의 얼굴에 무언가 가슴으로 느끼는 게 있음이 드러났다. 여러모로 보람된 음력 설날 아침이었다.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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