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가고있는 동안에

2024-02-27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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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놀라운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소문에 듣던 예수님이 나병 환자들의 골짜기 가까이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열 명 모두가 굴 밖으로 달려 나아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접근하여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셔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나병 환자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도 없고 더군다나 제사장을 만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체포되어 다시 나병자들의 골짜기로 끌려올 지언정 예수의 말씀대로 해보자는 결심으로 나병 환자들의 굴을 나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당신의 상식에 어긋나는 말씀이라도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내 상식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가 오랜만에 고향 나사렛에 돌아갔으나 고향사람들이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오랜 옛날부터 격언처럼 말해오던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지도자들의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깥사람들은 존경해도 고향 사람들은 배척하는 이상한 전통이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의 배척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구약성경의 창조설화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에덴의 입구에 불붙는 검을 든 천사가 입구를 봉쇄하여 에덴동산으로의 출입을 막아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돌아갈 수 없는 낙원이 된 것이다. 실낙원에서 어떻게 복낙원(復樂園), 곧 낙원을 회복하느냐를 우리는 소위 구원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예수를 ’앞서가는 예수(히브리 6:20)‘ 라고 표현하였다. ’ 앞서가는 자‘ 란 그리스어 원어에는 ’프로드로모스‘ 란 말로 되어있는데 직역하면 안내선이란 말이다. 항구에 큰 배가 오면 안내선이 배를 안내한다. 이 안내선이 프로드로모스이다.

안내선을 따라가야 그 항구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듯이 안내선인 그리스고를 따라가야 무사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에서 그리스도를 프로드로모스라고 부른 것이다. 프로드로모스를 따라가면 불가능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믿음이다.

미국 남북전쟁때 아들이 일선에 도주하여 탈주병으로 체포되자 아버지가 대통령에게 탄원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찾아갔으나 출입이 통제되었다. 한 아이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 갔더니 무사히 백악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대통령의 아들이었다.

아이가 감시병에게 “이 분은 나와 함께 아버지를 만날 분입니다.”고 하면 모든 출입구가 무사통과였던 것이다.
프로드로모스, 곧 앞서가는 안내선을 잘 따라가면 천국문도 무사통과한다. 히브리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프로드로모스가 되신다고 말한 뜻이 여기에 있다.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을 지휘할 때 청중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말하였다. “나도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 대원들도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위대한 것은 베토벤 뿐이다.” 기독교에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가 따라갈 지도자이다.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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