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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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벽돌

2024-02-02 (금)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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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초상화가 찍힌 벽돌이 한 방 가득 쌓여있는 사진을 보고 웬 벽돌인가 했더니 그것이 바로 돈이란다. 5만원권 지폐를 다발로 묶어서 사각으로 차곡차곡 쌓은 돈 벽돌 무게가 총 1톤 이상에 총액이 550억원이다. 5만원권 지폐는 크기 154x68mm로 2009년 6월23일 한국은행에서 처음 발행됐다.

이 돈 벽돌 사진은 지난 22일 부산지검 강력범죄 수사부가 불법도박사이트를 운영한 일당을 구속하면서 언론에 공개되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도박이 중고생에게까지 번지면서 인터넷 해외도박사업이 번창하고 있고 그들의 수입이 절정에 달하자 기념으로 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벽돌 돈더미를 보니 과거 쌀을 사기위해 돈을 리어카에 싣고 갔다는 6.25 당시 모습이 상상되었다. 1953년 3월의 물가는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대비 8,644배 상승했다. 1950년 6월 558억 원이던 화폐발행액이 1951년말 6,000억 원을 돌파했다. 상인들은 쌀가마니에 돈을 담아 리어카로 싣고 다녀야 했다. 이에 한국의 첫 번째 화폐개혁이 1953년 2월17일에 단행되었다. 한국전쟁 중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상 가장 심각한 초 인플레이션은 1921년 6월~1924년 1월 독일에서 물가상승률이 300%를 웃돌 때였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엄청난 규모의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수출이 급감하니 외환보유액이 줄어들었고 긴축재정을 통해 내수를 줄이자니 기업파산과 실업 반발이 예상되었다.

독일은 쉽고 간편한 길을 택했다. 배상금을 내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낸 것이다. 국가은행에서 지폐 더미를 쌓아놓고 배포하니 물가상승이 가속되고 마르크화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아이들은 마르크화 돈다발을 갖고 벽돌쌓기 놀이를 했고 가정에서 벽지로 발라지거나 땔감으로 사용되었고 빵 하나 사는데도 수레에 마르크화를 실어가야 했다. 이후 화폐개혁이 단행되고 배상금이 대폭 줄어드는 동시에 승전국과 경제적으로 협력하게 되면서 진정되었다.

현재 동남아시아와 남미의 일부 국가도 빵 하나를 사기 위해 수북한 지폐 뭉치를 가져가야 하는 거래 불편 현상이 보이고 있다. 이에 화폐개혁을 하기도 한다.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서 기존 화폐와 교환하자면 기존 화폐단위를 1,000분의 1, 또는 100분의 1로 낮춰야 한다.

그러나 화폐개혁은 부작용이 일어나거나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2008년 짐바브웨는 여러 번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실패했다. 2014년 달러, 유로, 남아공 및 보츠와나 화폐 등을 공식통화로 인정하며 사실상 자국 화폐를 포기한 바 있다.

새해가 되어서도 높아진 카드 금리에, 엄청나게 오른 물가를 감당하면서 주머니가 넉넉지 않은 사람들은 이 돈 벽돌 사진을 보면 위화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천문학적인 액수라 해도 남의 것은 돈이 아니다. 피와 눈물, 콧물이 묻은 저 돈에 얼마나 많은 이의 비탄, 상처, 원한, 통곡의 눈물이 쌓였을까를 생각해보면 그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종이더미일 것이다.

신현수의 시 ‘천국의 하루’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주 느즈막이 일어나/ 세수도 안하고 소파에 비스듬이 기대앉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듯한 햇볕을 쬐며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보고...(중략) 편의점에 들어가 천삼백원 주고 산 바나나 우유로 목을 축인 후, 동네 목욕탕에 오천오백원 주고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한증막에 들어가 천원 주고 구운 계란 두 알을 사먹은 후. 제과점에 가서 어머니 드릴 카스텔라를 삼천원 주고 산 후, 어머니 좋아하는 ‘도전 골든벨’을 같이 보았다.”

시인은 하루 1만800원, 10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천국을 맛보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다시 잃은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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