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영화이야기 - ‘란’(Ran·1985) ★★★★(5개 만점)
‘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동양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일본의 거장 아키라 구로자와의 생애 마지막 걸작 사무라이 영화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동양적으로 해석했다. 심오한 주제와 찬란한 이미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방대한 서사시로 구로자와는 음모와 살육, 배신과 권모술수 그리고 책략과 복수가 뒤엉킨 인간우행을 극적이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화면에 채색하고 있다.
내란이 판을 치던 16세기 일본. 노 영주 히데도라 이치몬지(다추야 나카다이)는 어느 날 사냥을 나가 대권을 장남 타로에게 인계하고 차남 지로와 삼남 사부로에게는 제2, 제3의 성을 각기 물려준다. 그러나 사부로는 두 형이 불원 서로 남의 땅에 욕심을 내 살육을 자행할 것이라며 아버지의 결정에 불복하다 추방된다.
타로와 지로의 추한 본능과 탐욕 때문에 살던 곳에서 쫓겨난 히데도라는 30명의 무사와 함께 광야를 헤매게 된다. 히데도라는 폐쇄된 성에 거처를 정하나 두 아들이 여기까지 쫓아오면서 양측 군대 간에 격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 장면이 처절하니 아름답다.
갑옷에 투구를 쓰고 마치 나비들이 나부끼듯 바람에 떠는 적과 황의 깃발들을 날리며 수천의 기마병들이 검은 빛의 흙더미와 성을 향해 진격할 때 영화는 음향을 생략하고 귀기서린 음악(토루 타케미추 작곡)을 삽입, 살육에서 공포와 절대미를 느끼게 만든다.
타로는 지로를 절대 권력의 영주로 만들려는 지로의 장군에 의해 살해되고 남편 못지않게 탐욕스럽고 간교하며 표독스런 타로의 미망인 가에데(미에코 하라다)는 어수룩한 지로를 위협, 자신의 사리사욕을 취한다. 아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또 형제간 싸움에 장남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리고 반세기 동안 자신이 정복해온 모든 것이 초토화하는 것을 목격한 히데도라는 분노와 배신감과 허무감 탓에 광인이 된다.
마침내 히데도라는 자기가 추방한 사부로와 재회하나 사부로마저 지로의 병사에 의해 살해된다. 모든 것을 잃은 히데도라는 절망감을 못 견뎌 숨진다. 살육으로 권세를 얻은 자의 인과응보적 말로다.
일본과 프랑스 합작품으로 영화 전체에서 흐르는 광기와 무상함의 분위기에서 동양적 허무주의 사상과 함께 생애 말기의 구로자와의 현세를 보는 비장감이 느껴진다. 나카다이의 포효하고 통탄하고 체념하는 연기와 함께 하라다의 표독스런 연기가 일품이다. 오스카 의상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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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