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호주머니에서 누군가 단 돈 10달러라도 훔치려 할 때 가만 있을 사람은 없다. 또 나라마다 법과 제도는 다르지만 절도를 용인하는 곳은 단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할 경우 사회의 근본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도둑보다 큰 규모의 절도가 백주 대낮에 공공연히 일어나는데도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 도둑의 이름은 인플레이션이다. 100달러를 가지고 있는데 10%의 인플레가 발생해 화폐의 실질 가치가 90달러가 되면 도둑에게 10달러를 도둑맞은 것과 효과는 똑같다. 전에는 100달러 어치 물건을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90달러 어치밖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장기간 계속되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사회는 어지러워진다.
멀리는 로마와 스페인 제국부터 가깝게는 제정 러시아와 바이마르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망할 때 고 인플레가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길은 화폐를 쓸모 없이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이 말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모든 사회에 적용된다.
작년 한 때 9%를 넘었던 미국내 소비자 물가가 급속히 내려가고 있다. 지난 주 노동 통계국 발표에 따르면 10월 소비자 물가 지수는 3.2%를 기록했는데 이는 2년 반만에 최저 수준이다. 물가가 내려가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고물가에 시달려왔던 영국은 5% 밑으로, 유로존은 3% 이하로 하락했다. 중국은 인플레가 아니라 디플레를 걱정하고 있다.
1년여만에 인플레가 이렇게 잡힌 것은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가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년 0%대이던 연방 단기 금리는 이제 5%가 넘는데 이처럼 단기간에 금리가 올라간 것은 드문 일이다.
인플레가 진정 기미를 보이면서 더 이상의 금리 인상은 없다는데 전문가들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번 인플레 숫자 발표 이전까지 12월 회의에서 FRB가 금리를 추가 인상할 가능성을 30%로 보던 시장은 이제 5%로 낮춰잡고 있다. 반면 내년 5월까지 금리를 내릴 가능성은 23%에서 86%로 치솟았다.
앞으로도 인플레는 내려갈 것을 시사하는 통계가 계속 나오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연방 준비은행 자료에 따르면 한 때 연방 정부 코로나 지원금으로 2조 달러에 달했던 미국인들의 초과 저축은 올 6월말 현재 1,900억 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올 연말까지는 모두 소진될 것으로 보인다.
10월 소매 판매고는 전 달에 비해 0.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7개월만에 처음이다. 반면 올 1/4분기 2.43%에 달했던 크레딧카드 연체율은 2/4분기 2.77%로 늘어났다.
또 소비자 물가 상승의 주범이던 렌트비 인상 폭은 2월부터 정점을 찍은 후 계속 하락, 10월 현재 코로나 이전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렌트비는 인플레 통계 반영이 늦기 때문에 향후 추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역시 소비자 물가에 영향을 주는 생산자 물가도 10월 0.5% 하락했는데 이는 2020년 4월 이래 최대 폭으로 내린 것이다.
이런 모든 정황들은 바이든 재선에 최대 위협이었던 고 인플레가 내년 대선 전까지 해결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바이든은 30대 이하와 라티노, 흑인들의 지지를 큰 폭으로 잃었는데 그 주요 요인이 인플레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인들의 2/3는 그 달 받은 월급으로 그 달 생활을 꾸려가며 긴급 상황에 쓸 여유 돈 수천 달러도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성향은 젊은 세대와 소수계들 사이에 더욱 심하다. 바이든을 뽑으면 잘 살 줄 알고 찍어줬는데 시장에 가도, 주유소에 가도 월급 인상분보다 물가가 더 올라 살기가 더 팍팍해졌다면 이들이 또 다시 바이든에 표를 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물가가 잡혔다고 바이든 재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81세라는 나이도 문제지만 물가가 안정됐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다 초과 저축이 사라지고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소비가 줄면서 경기가 급속도로 식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향후 경기의 가장 정확한 풍향계로 불리는 장단기 금리는 아직도 역전된 상태고 무엇보다 미 역사상 불황 없이 인플레가 잡힌 일이 없다는 것도 걱정거리다. 물가를 잡더라도 불황으로 실업자가 빠르게 늘어나면 이 또한 바이든 재선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과연 FRB가 불황을 피하면서 인플레를 잡는 금리 정책의 묘를 보여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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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