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으로 구별되어 있다. 합리적인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이 비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어떤 점에서는 편향적으로 기울 때가 많다. 착하고 좋은 사람은 누구냐라고 할 때 문제를 만들지 않고 조용하게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만들고 조용하지 않고 떠드는 사람이 악하고 나쁜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세상의 고민과 갈등은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비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지나치게 합리적인 때를 만날 때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아폴론 신과 디오니소스 신이 나온다. 아폴론 신은 햇빛과 낮의 신이고, 디오니소스 신은 술의 신이다. 아폴론신은 지혜롭고 합리적이고 신중하고 서둘지 않고 질서가 있어서 마치 설계사가 집을 짓는 것처럼 조직적이고 계산적이고 이론적인 신이다.
그와 반대로 디오니소스는 즉흥적이고, 현실감이 없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을 한다. 어떤 한계나 선이 없는 신이다. 방탕과 방황 때문에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힘들게 한다.
우리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두 가지 모습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삶이 허무맹랑하지 않고 차분히 계획한대로 조심스럽게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정한 시기에 공부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고, 적당한 때에 어떤 일을 이루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상을 탈피하여 조직과 제도를 벗어나 자유로운 몸과 영혼이 되기를 원할 때가 있다. 그래서 홀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홀로 춤을 추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과감하게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합리적일 때는 이룰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경우가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 가다보면 하루가 지나도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아폴론적인 것은 때로는 지나친 환상과 꿈에 젖어 있지만 실제로 이루지 못할 경우가 많다. 여기 저기 샤핑을 하러 다니지만 하나도 사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이런 경우이다. 가격과 품질, 실용성과 필요성 등을 이리 저리 따지다가 결국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디오니소스적인 사람은 지갑에 돈이 없으면서도 유명 백화점에 가서 비싼 물건들을 한 시간안에 사면서 어떻게 나중에 물건 값을 갚아야 할지 고민도 하지 않는다.
사실 아폴론적인 사람이나 디오니소스 적인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완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는 이렇게 완전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슬퍼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비극의 탄생”이라는 표현을 했다. 우리의 인생이 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조화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의 인생이 비극이 되지 아니하려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 더 나아가서 이런 것들이 합해진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철학자의 이성을 가질 때가 있지만 동물적인 충동에 유혹될 때가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여호수아1:7)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복무하다 4차례 탈옥을 시도하다 결국 19년의 징역을 살게 된다. 그리고 또 성전에서 은촛대를 훔쳤지만 성전주교의 도움을 받아 감옥 갈 위기를 넘기게 된다.
우리는 늘 이런 합리적인 요구와 충동적인 욕구와 싸우게 된다. 우리의 삶의 환경도 이런 위기를 만난다. 그래서 갈등도 생기고, 다툼도 생기고, 분열도 일어난다.
아폴론적인 합리와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 서로 조화가 되는 그 순간, 시간들이 계속된다면 우리 귀에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고, 우리 눈에 위대한 그림을 보는 예술적 삶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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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