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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엔 갭’과 아메리칸 드림

2023-09-1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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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아메리카와 남 아메리카는 한 대륙이다. 그러나 차로 북미 북단에서 남미 남단까지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나마의 ‘다리엔 갭’이라는 곳 때문이다.

급류가 흐르고 높은 산과 정글, 독사와 독충으로 뒤덮여 있는 이곳은 차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니는 길도 없다. 알래스카에서 칠레까지 총 연장 1만9,000마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팬아메리카 하이웨이도 이 다리엔 66마일 구간만은 끊겨 있다. 다리엔 ‘갭’이란 이름은 그래서 붙었다. 한 때 이곳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그럴 경우 환경 파괴와 함께 질병과 마약의 이동이 쉬워진다는 이유로 결국 무산됐다.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 대서양 쪽에서 여기 도착한 스페인의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가 ‘남쪽에 또 다른 바다가 있다’는 원주민 말을 듣고 탐험에 나서 1513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와 태평양을 목격했다. 파나마라는 마을도 그 인근에 세워졌다.


17세기 유럽 빈국의 하나였던 스코틀랜드는 파나마가 동서 교역의 중요 길목에 자리잡고 있음에 착안, 1698년 국부의 20%를 쏟아부어 다리엔에 ‘뉴 칼레도니아’란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부푼 기대와는 달리 태풍과 풍토병, 이 일대를 자기 영역으로 여기던 스페인 함대의 공격 등으로 이곳으로 이주한 1,200명의 스코틀랜드인들은 1년여만에 사실상 전멸했다.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은 스코틀랜드는 1707년 영국과의 합병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다.

‘다리엔 갭’이 요즘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을 거쳐 미국까지 가려는 중남미인들이 몰려 들면서 인접 콜롬비아 국경 마을들은 붐타운으로 변하고 있다. 2021년까지만 해도 이 험한 곳을 넘어가려는 사람들은 13만 정도였지만 작년 25만을 넘더니 올해는 9월 현재까지 36만을 돌파했다. 지난 8월에는 사상 최고인 8만2,000명이 이곳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아이티와 베네수엘라 등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인근 나라 주민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곳을 거쳐 미국까지 가겠다고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약 딜러들은 수수료를 받고 비밀 통로로 경호까지 해주며 안내해 주고 있다. 이들이 가져오는 돈 덕에 네코클리 등 콜롬비아 국경 마을에는 10만 달러짜리 고급 SUV를 종종 볼 수 있으며 텐트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도했다.

미국으로 오는 사람은 이들만은 아니다. 작년 9월말 현재 지난 1년간 세관 국경 수비대가 체포한 밀입국자는 270만이 넘는데 이는 전년도 170만에 비하면 100만이 늘어난 것이다. 수비대는 질병 통제 목적으로 제정된 타이틀 42 규정에 따라 이중 100만 명을 즉시 추방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믿을만한 공포’(credible fear)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추방을 면하고 난민 심사를 받을 수 있다.

난민 심사에 들어가면 일단 미국 안에서 살 수 있고 6개월 안에 노동 허가가 나온다. 난민 심사에는 보통 4년 넘게 걸리는데다 불합격해도 숨어서 불법체류자로 살면 되기 때문에 당장 먹을 것도 없고 전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베네수엘라나 아이티에서 사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는 계산이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물론 잘못이지만 이렇게 된데는 미국 정치인들의 책임도 크다. 미국은 지금도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트랜스아메리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상태는 2026년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2033년까지 소셜 시큐리티 기금은 고갈되고 그렇게 되면 20% 이상 혜택 삭감이 불가피하다.

미국인들의 평균 수명은 갈수록 늘어나고 은퇴자 수는 점점 더 증가하는데다 미국인들의 중간 연령은 계속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30세이던 미국인은 중간 연령은 2000년 35세가 되더니 이제는 38세를 넘어섰다. 40세를 넘기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로 인한 재정 악화를 막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젊은 이민자 수를 대폭 늘리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다리엔 같은 험지를 목숨을 걸고 넘어 오는 사람들은 그 체력과 용기만으로도 미국에 활기를 불어넣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미국 주도권을 소수계에게 넘겨줄 것을 두려워하는 백인 유권자 눈치를 보느라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조차 대대적인 이민자 확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미국에서 오래 산 이민자 눈에는 범죄와 홈리스, 인종 갈등과 재정 악화에다 루저 도널드 같은 사이비 정치인이 날뛰는 등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이지만 베네수엘라와 아이티 이민자에게는 아직도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는 기회의 땅인 모양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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