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아래 한 청년이 앉아 있다. 이 청년은 한 때 작은 성주의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남루한 옷 한 자락 걸친 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6년간 각지를 떠돌며 고행의 수도승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청년의 나이는 35세,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기원 2세기 아스바고사가 쓴 그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기인 ‘부다카리타’에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 이 날 모습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그가 깨달음의 문턱에 다다르자 온 세상이 기뻐했지만 단 하나 절망에 빠진 존재가 있었다. 욕망과 죽음의 화신 마라였다.
그는 온갖 수단으로 고타마의 해탈을 방해하려 하나 그의 부하 괴물들이 던진 무기는 꽃비로 변하고 ‘갈증’과 ‘불만’, ‘욕망’이란 이름을 가진 세 딸의 유혹도 무위로 끝난다. 고타마는 깨달음을 얻고 ‘부처’(깨어난 자)가 된다.
그 후 7일간 명상에 잠겨 있던 그는 부처가 되는 길을 전파하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지와 욕망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절망에 빠져 중생을 제도하려던 생각을 포기하려 한다. 이 때 주신 인드라와 브라마가 내려와 사람마다 욕망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며 포기하지 말라고 간청한다. 이 말에 부처는 마음을 바꾸고 그 후 장장 45년간 인도 곳곳을 누비며 법을 전파한다.
그 날 고타마가 깨달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그가 왜 호화롭고 안락한 왕실의 삶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택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수도다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고타마를 극진히 보살피고 흉한 것은 일체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시종과 같이 궁전을 나온 고타마는 길가에서 노인과 병자, 시체를 차례로 발견한다. 시종으로부터 이것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란 말을 들은 왕자의 충격은 컸다.
그리고 또 그는 정원에서 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는 참새와 이 참새를 먹으려는 매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절망한다. 인간을 포함해 어차피 소멸해갈 존재인 생명체들이 그 짧은 기간에도 자기가 살겠다고 남을 해치는 것을 서슴지 않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내린 결론이 ‘네 개의 위대한 진리’ 곧 사성제다. ‘고집멸도’라 불리는 이 진리는 세상의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나오고 집착을 멸함으로써 고통을 없앨 수 있으며 그 방법은 ‘팔정도’라 불리는 8개의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란 가르침이다.
여기서 ‘고’는 고대 인도어인 팔리어 ‘두카’의 번역으로 ‘두카’는 수레의 바퀴와 축이 어긋나 삐걱대는 모습 또는 뼈와 뼈가 어긋난 모습을 뜻한다. ‘집’은 역시 팔리어 ‘탄하’의 번역으로 ‘목마름’을 뜻한다. 영어의 ‘thirst’와 어원이 같다. 살고자 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다 뼈가 어긋나 고통받다 사라지는 생명체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는 유대 기독교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세기에도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빵을 먹겠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거기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먼지고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기 욕망의 억제가 고통의 소멸과 직결돼 있다는 고타마의 통찰은 예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의 첫마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의 ‘회개’는 그리스 원어 ‘메타노에이테’의 번역으로 ‘마음을 바꾸라’는 뜻이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혹은 공동체 중심으로 바꾸라는 말이다.
그러나 둘 다 이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개체가 이기심을 버리면 공동체는 좋겠지만 개체는 소멸할 가능성이 큰데 이를 무릅쓰고 자기를 희생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고타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잠시 설법 포기를 생각한 것이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친 것 모두 구원의 지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타마는 신들의 설득으로 법륜을 굴리기로 결심하고 예수는 “다 이루었다”는 말과 함께 숨을 거둔다. “하나님, 하나님…”이란 외침은 실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평가받는 22편의 첫마디로 이 글의 마지막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의 약속으로 끝난다. 흥미롭게도 고타마의 이름인 ‘싯다르타’ 역시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예수와 고타마의 삶은 ‘세상의 구원이 가능한가 아닌가’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너는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임을 가르친다. 지난 5일은 땅 위를 걸었던 아마도 가장 위대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신일이었다. 인류는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지만 그런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롭게 삶을 시작할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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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