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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의 성난 사람들’

2023-09-13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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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영화 관람이 극히 제한적이던 1970년대, 늘 기다려지던 TV프로그램이 KBS ‘명화극장’과 MBC ‘주말의 명화’였다. 이 프로들을 통해 할리웃의 수많은 클래식 영화들을 감상했던 학창시절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시드니 루멧 감독)이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영화는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 서로 이름도 모르는 12명의 배심원들이 뉴욕법원의 작은 배심원실에서 싸우고 논쟁하고 증명하고 반증하고 설득하며 설득당하는 이야기를 1시간 반에 걸쳐 긴장감 넘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처럼 작은 방 안에서 이처럼 파워풀한 스토리를 구현해낸 영화는 아마 다시 없을 것이다.

사건은 슬럼가에서 자란 전과5범의 18세 히스패닉 소년이 자신을 때린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한 1급 살인사건. 유죄판결을 나오면 사형이 불가피한 케이스인데, 법정과 배심원단 모두 유죄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전원 백인남성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심리가 시작되자 빨리 표결을 만장일치로 끝내고 집에 가자는 의견이 팽배하다. 그날 저녁 뉴욕 양키스 경기에 가야한다는 등 다들 시간낭비하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가운데 단 한 사람, 배심원 8번(헨리 폰다)이 이의를 제기한다. 한 젊은이의 목숨이 달린 일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처리하지 말자며 사건의 정황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짚어가기 시작하자 유죄를 100% 확신하는 배심원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찜통 방안에서 성격과 출신과 배경이 다른 성인남자 12명이 땀에 흠뻑 젖어 일개 불량소년의 살인사건에 매달려있는 짜증스러운 상황,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새로운 의문점들이 계속 제기되고 배심원들의 태도가 하나둘 달라진다. 표결은 처음에 11대1에서 10대2, 9대3, 8대4, 7대5, 6대6으로 점점 유죄보다는 무죄 쪽으로 기울어져간다.

“유죄가 확실한 게 아니면 무죄로 추정한다”는 미국의 배심원 제도를 이처럼 잘 다룬 영화는 없을 것이다. 얼마나 긴박감 넘치는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첫 장면부터 끝까지 그대로 빨려 들어간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에 근거한 배심원단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는 배심원 소환장을 받으면 어떻게든 피할 궁리부터 하지만, 배심원제는 미국 사법시스템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제도다. 소수의 법조권력이 판결을 좌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 시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해 죄의 유무를 판단하도록 하는 민주주의적 장치인 것이다.

배심원은 크게 두 종류로, 중범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대배심원(Grand Jury)과 재판에 참여하는 소배심원(Petit Jury)이 있다. 우리가 아는 소배심원은 12명이 공개 재판에 참여한 후 만장일치 결정으로 죄의 유무를 정한다.

한편 대배심은 검찰의 기소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연방법 위반이나 중범죄를 저지른 경우 검찰은 반드시 대배심을 통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대배심원은 주에 따라 16~23명으로 구성되며 12명 이상이 찬성하면 기소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올해 무려 4회에 걸쳐 각기 다른 대배심에 의해 기소됐다. 지난 3월 뉴욕 맨해튼 대배심이 성추문 입막음 돈 지급을 위해 회계장부를 위조한 34개 혐의로, 6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연방대배심이 마라라고 사저 내 기밀문건 불법 보관 및 반환 거부 등 37개 혐의로, 8월1일 워싱턴 DC 연방대배심이 2020 대선결과를 뒤집기 위해 선거인단 표결 인준 등 공무집행 방해 등 4개 혐의로, 그리고 8월14일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대배심이 조지아주에서 투표 결과를 뒤집으려 위조, 공갈, 허위진술 및 허위문서 제출 등 압력을 행사한 13개 혐의로 기소했다. 이 외에도 트럼프에 대한 3건의 민사소송이 계류 중이다.


이 기소들의 재판일은 워싱턴 DC의 내란 건이 내년 3월4일, 뉴욕주의 회계 위조 건이 3월25일, 플로리다주의 기밀서류 은닉 건이 5월20일로 잡혀있으며, 조지아주의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재판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재판 일정들은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이제 공은 대배심에서 소배심으로 넘어갔다. 재판이 열리는 4개 지역에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배심원 선정작업에 특별히 공을 들일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가진 견해와 경험과 성향에 따라 배심원 구성이 어느 한 쪽에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의 주민들은 1월6일의 국회의사당 폭동 사건을 생생하게 겪은 사람들이다. 맨해튼은 민주당 성향의 주민들이 많다.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역시 주민들이 진보적인 편이다. 그러나 플로리다주는 트럼프가 우세한 지역이다.

이 모든 재판에서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배심원들만이 선정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특히나 트럼프에 관해서는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에 검찰이 제시하는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평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배심원 판결은 만장일치여야 하므로, 트럼프는 각 재판에서 단 한명의 지지자만 있어도 불일치 배심(hung jury)으로 풀려날 수 있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헨리 폰다가 남긴 명대사가 있다. “언제나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 트럼프 재판에 나서게 될 배심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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