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세기 11:4)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이다. 노아 시대에 대홍수로 온 세상이 쓸려나간 후 한동안 겸손히 고개 숙이고 살았을 인간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벽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 성과 탑을 쌓고 마침내는 하늘에 닿을 야심을 키웠다. 신의 영역을 넘보는 무모한 도전을 신은 용납하지 않았다. 여호와가 세상에 내려와 언어를 교란시키자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안 돼 흩어지고 탑은 무너졌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란’을 의미한다.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의 상징으로 보통 해석되지만 탈무드는 가치의 전도를 지적하기도 한다. 구약시대 권력자들은 높은 건조물을 세워 자신의 권세를 과시했다. 높게 더 높게 탑을 쌓다보니 땅에서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건조과정에서 많은 노예들이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탑 꼭대기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으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벽돌이 떨어지면 모두가 울부짖으며 슬퍼했다. 벽돌을 다시 꼭대기까지 가져가 쌓으려면 1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관심이 온통 탑에 가있다 보니 벽돌이 인간보다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가치의 전도이다.
바벨탑의 시대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올라가려는 도전정신은 인류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그 높은 탑, 목표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망각하는 일이 발생한다. 가치의 전도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역사상 전례가 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보통의 현대인들은 과거 왕들이나 누렸을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물질 혹은 자본의 위세가 너무 강해졌다. 자본의 논리 앞에서 인간의 가치는 뒤로 밀리고, 자연은 이윤추구를 위한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산도 들도 바다도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훼손되고 파괴되었다. 그러기를 줄잡아 200년. 지구는 병들고 병든 자연은 사납게 분노하고 있다. 폭염, 산불, 토네이도, 태풍, 홍수 등 이름 가진 온갖 자연재해들이 이 여름 지구촌 곳곳을 뒤집어 놓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삶의 근간을 잃었다.
잔인한 여름이 지나고 있다. 이상기후와 자연재해가 이렇게 심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와이의 대표적 휴양지, 마우이는 지난 8일 덮친 화마로 섬의 절반이 초토화했다. 하와이 왕국의 수도였던 라하이나는 유적지를 비롯, 수십 수백년 가꾼 삶의 터전들이 단 몇 시간 만에 잿더미가 되면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더미와 불탄 자동차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 처참하다. 초여름부터 산불이 시작된 캐나다는 수백 건의 산불이 여름 내내 계속되면서 아직도 불타고 있다. 자욱한 연기가 국경너머로 내려와 뉴욕 등 북동부 지역에서는 바깥 공기를 편하게 들이마실 수가 없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후연구 기관들에 따르면 지난 7월은 기상 기록을 시작한 이래 가장 뜨거웠던 달이었다. 전 세계 평균기온 기준, 12만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뜨거웠던 달이었을 것으로 보는 기후학자들도 있다. 기록적으로 뜨거웠던 날 3일이 모두 지난달에 들어 있었다. 한해 단위로 볼 때 기록적으로 뜨거웠던 8대 고온의 해는 모두 2015년 이후였다. 지구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뜨겁게 달궈진 지표면, 바싹 마른 초목, 강풍에 불씨 하나 더해지면 산과 들은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고, 자연풍광 찾아 산속 깊이 개발된 주택단지들은 화마를 피할 길이 없다. 과거 초목만 태웠던 산불들이 막대한 재산손실과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배경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1980년 이후 10억달러 이상 재산손실을 낸 자연재해는 총 357건이다. 문제는 이런 대형재난이 점점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 1980년대, 손실 10억달러 이상인 재난과 재난 사이의 간격은 평균 82일이었다. 2017~2021년 이 간격은 평균 18일로 좁혀졌다. 1980년 이래 기후관련 재해로 발생한 손실액은 총 2조5,400억달러. 재난이 점점 자주 일어나니 손실은 더 빨리 더 크게 불어날 것이다.
기후변화가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은 50년 전 부터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신기한 이야기, 우리와는 무관한 일로 여겼다. 이제는 달라졌다. 기후변화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과거와 비교해 분명 기후가 달라졌다는 사실, 기후재앙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피부로 느낀다. 화석연료 사용 등으로 인한 탄소 배출,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기후변화를 일으킨다고 과학자들은 확인한다.
이 여름이 기후정책의 변곡점이 될지 모르겠다. 기존의 안일한 기후대책, 개개인의 무감각한 생활태도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바벨탑이 아래로부터 허물어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폐허가 된 마우이는 오하나(Ohana)와 쿨레아나(Kuleana) 정신으로 뭉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라는 오하나, 그리고 각자 자기 할 몫을 다하자는 책임감의 쿨레아나이다. 언제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를 기후위기의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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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