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리베라(1886-1957)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민중예술의 거장이다. 유럽에서 공부했지만 멕시코 토착문화에 뿌리를 둔 그의 독특한 화풍은 동시대의 파블로 피카소와 비견될 만큼 특별한 평가를 받는다.
2017년 라크마(LACMA)는 피카소와 리베라의 작품 150여점을 나란히 소개하는 기획전(Picasso and Rivera: Conversations Across Time)을 연 적이 있다. 100년전 큐비즘을 받아들인 두 화가가 각각 서양문명과 라틴문명 속에서 이를 어떻게 펼쳐나갔는지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리베라는 또한 천재적인 벽화화가였다. 공공미술에 대한 그의 헌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미국의 여러 기관들이 그에게 벽화를 의뢰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만 3점의 벽화를 남겼는데 이중 마지막 작품인 ‘팬 아메리칸 유니티’가 현재 현대미술관(SFMOMA) 1층에 전시돼있다. 2년전 방문 때 이 벽화를 보았는데 그 위용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처음에는 복제품인줄 알았었다.
이 외에도 디트로이트미술관에 대형벽화를 남겼고, 1932년 록펠러센터의 로비에도 벽화를 그렸으나 이는 레닌의 얼굴이 들어간 사회주의 찬미 작품이라는 이유로 훗날 철거됐다.
그리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었다. 사실은 오랫동안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였지만 언젠가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서술하는 순서가 바뀌었다. 페미니즘이 부상하고 여성작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면서 칼로의 위상이 높아진 탓이다. 삶과 예술 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오늘날 자유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고,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 불꽃같은 작품들은 많은 이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프리다란 이름은 평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6세 때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짧아졌고, 18세 때 버스와 전차 충돌사고로 온몸이 부서졌다. 부러진 쇠막대기가 그녀의 허리를 관통하면서 척추 3군데가 부러졌고 복부와 자궁이 뚫렸으며 오른쪽 다리 11곳이 골절, 오른발은 완전히 뭉개졌다. 쇄골이 부러졌고 어깨뼈도 골절됐다. 의사들이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이 사고 때문에 그녀는 짧은 생애동안 30번이 넘는 고통스런 수술을 받아야했다.
원래 의사가 되려던 그녀가 화가가 된 이유가 이 사고 때문이었다. 3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치지 않은 두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부모는 침대 위에 이젤과 거울을 설치해주었고 프리다는 거울 속 자신을 관찰하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남긴 143점의 회화 중 자화상이 무려 55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들을 통해 그는 평생 자신을 찌르는 고통과 상처, 피 흘리는 절망과 열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짙은 갈매기눈썹, 강렬한 눈빛, 강인한 턱, 육감적인 입술… 독특하게 아름다운 그 얼굴은 그림 속에서 한 번도 웃지 않는다.
프리다의 또 다른 고통은 그녀의 사랑이자 멘토이며 21살 연상인 디에고 리베라였다. 남편은 천하에 바람둥이였고 여성편력이 그칠 줄을 몰랐다. 모델을 선 여자는 모두 그의 품에 안겼고 심지어 프리다가 아픈 동안 처제인 여동생과도 불륜을 나눴으니, 그처럼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여성이 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임신을 간절히 원했지만 골반에 입은 손상 때문에 세 차례나 유산한 것도 큰 아픔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들을 오브제 삼아 선혈이 낭자한 예술에의 열정을 불살랐던 프리다 칼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였다. 그리고 후자가 훨씬 나빴다”
2002년 영화 ‘프리다’는 그녀의 불꽃같은 생애를 뜨겁게 그려낸 수작이다. 프리다 역의 살마 헤이엑이 마치 프리다의 환생인 듯 신들린 연기를 펼쳐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지난 주말 뮤직센터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프리다’ 공연이 있었다. 아나벨 로페즈 오초아(Annabelle Lopez Ochoa)가 창작하고 안무한 아주 특별하고 아름다운 현대발레 작품이었다. 타악기를 많이 쓴 오리지널 음악(Peter Salem)의 라이브 연주가 특히 좋았고, 판타지 느낌으로 연출한 의상과 무대, 세트 디자인이 환상적이었다.
프리다는 멕시코 토속문화와 전통의상,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의 수호자로 유명했다. 그런 원색의 라틴 컬처는 클래식 발레와 어울릴거 같지 않았는데 발레 ‘프리다’는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생생한 색채감과 회화적 이미지가 클래식하게 승화된 무대였다.
안무가 오초아는 프리다의 수많은 알터 에고, 또 다른 자아들을 창조하여 그녀의 꿈과 희망과 영혼, 고통과 상처와 좌절을 대변했다. 칼로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10명의 남자댄서들이 알록달록 치렁치렁한 치마를 두른 채 춤추는 장면들이 너무나 파워풀했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해골 댄서들은 프리다를 평생 따라다닌 죽음의 그림자요, 나비와 파랑새와 사슴은 자유와 희망을 춤추었다.
프리다 칼로는 평생 춤을 추기는커녕 걷기조차 힘들었던 환자였다. 그런 그녀가 수많은 분신들과 함께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을 보는 동안 진한 감동과 전율이 몰려왔다.
“나의 퇴장이 기쁨이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가 남긴 유언이다. 그녀가 평생 살았던 집 ‘카사 아줄’은 뮤지엄이 되었고, 그녀의 사후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의 모든 작품을 국보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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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