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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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화’된 정치

2023-06-06 (화)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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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한 방송국 시사프로그램에서 정치적 성향이 완전 반대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또 연인이나 부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첫 번째 질문에는 약 54% 정도가 그렇다고 응답했고 두 번째 질문에는 36% 가량이 그렇다고 밝혔다.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취지의 조사였다. 정치적 생각이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결과이다. 하지만 설문 결과가 정치로 인해 무수한 관계들이 망가지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종류의 설문에서는 긍정 비율이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경우보다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투표를 할 것인지 의향을 묻는 설문조사를 선거 수개월 전에 하면 항상 실제 투표율보다 훨씬 많은 긍정 답변이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

정치적으로 완전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처럼 용이한 일은 아니다. 정치적 생각과 인식은 삶의 기본적인 가치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성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가 극단화되면서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정치적 견해에 따라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단계를 넘어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악마화’하는 극단적인 단계로 치닫고 있다. 이런 적대적 분위기에서는 생산적인 토론이나 대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지난 몇 달은 이런 이념적 분열 때문에 두 동강 난 미국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트럼프 기소를 놓고 갈라진 미국, 그리고 공화당이 다수인 테네시 주 의회가 총기규제 시위에 참가한 흑인의원 2명을 제명한 초유의 사태(두 명은 나중에 다시 복귀했다)는 미국사회의 정치적 갈등이 어느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남북전쟁’은 150여 년 전 끝났지만 미국은 정치적으로 또 다시 내전 상태에 돌입해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런 갈등을 해소하거나 완화시킬만한 뾰족한 처방이 없다는 사실이다. 병증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는 단순히 정치경제적 이슈를 둘러싼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유권자의 당파적 정체성은 인종적, 종교적, 성적, 문화적 정체성과 함께 결합되면서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의 형태로 고착돼 왔다.

‘정서적 양극화’의 해소가 쉽지 않은 것은 이것이 뇌리에 깊숙이 고착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지하는 정당 혹은 후보가 패하면 그것은 곧 자신이 ‘루저’가 된 것 같은 열패감과 분노로 연결된다. 그러면서 상대에 대한 분노 게이지는 높아진다.

지난 2020년 대선이 끝난 후 미국사회의 분열과 관련한 많은 진단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 학계의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미국정치가 ‘석회화’(calcification)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석회화’는 칼슘이 과도하게 침착돼 몸의 조직이나 기관이 돌처럼 단단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신체의 ‘석회화’처럼 미국정치가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정치학자들은 1952년 미국 유권자들 가운데 민주·공화 양당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50%였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을 가진 유권자가 9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정치적 의식이 ‘석회화’되지 않은 유권자들은 무조건 자기 당에 표를 던지는 ‘묻지마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인들의 경제적 형편과 정치적 견해에 차이가 크지 않아 ‘대압착(Great Compression)시대‘라 불렸던 1960~70년 대 미국에서는 남부 주들에서 민주당이 약진하거나 동부와 서부 주들에서 공화당이 강세를 보이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일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다. 1980년대 이후 정치적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손을 맞잡은 채 춤추기 시작하면서 정치의 ’석회화‘는 미국을 기능부전 상태로 빠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전혀 없는 것인가. 석회화된 정치를 녹여낼 만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닌 비범한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그런 기대는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으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유권자들밖에 없다. 일부 지식인들과 학계를 중심으로 갈라진 미국의 봉합을 위한 다양한 대화노력들이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은 성과를 체감하기 힘들다. 오는 2024년 대선은 점차 바이든과 트럼프의 리매치로 굳어지는 형국이다. 그럴 경우 미국정치는 ‘석회화’의 단계를 넘어 ‘암석화’의 단계로 들어설지도 모른다.

20세기의 뛰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언젠가 “후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믿고 싶은 것보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라.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현명하고 증오는 어리석다는 것을 명심하라.” 마치 반지성주의와 증오가 판치는 오늘의 정치를 내다본 선지자의 예언처럼 들린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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